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다문화칼럼함께하는세상] “그런데 ‘이 기상’이 뭐예요?”

몇 해 전 결혼이민 여성들의 귀화 면접 시험 대비를 위해 모의 면접을 진행했다. 내게 면접관 역을 맡긴 담당 직원이 리얼리티를 살리려면 건조하게 응대하고 질문의 난이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국경일에 대해 질문했고 6개 광역시가 어디냐고 물었고,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보라고 했다. 가혹하다 싶었지만 많이 출제되는 문제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기 거두고 물었다. 누군가 애국가를 4절까지 꼬박 불렀다. 곡조는 들어본 바 없고 발음은 독특했으나 가사는 완벽했다. 면접관 체면 구기고 눈물이 날 뻔했다. 다음 사람에게도 애국가를 불러보라 했다. 이번에는 1절 전반부도 못 넘어가는 게 아닌가. ‘성의가 없지 않소!’ 말할 뻔했다. 면접관 역에 너무 몰입했나 보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애국가를 되뇌며 퇴근하는데 내 입에서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며칠 전 귀화 준비하는 회원들을 돕고 있는 직원과 얘기를 나눴다. 온·오프라인 자료를 두루 찾아서 공부시키고 예상 문제를 만들어 질문하고 있다고 했다. 생활하면서 알게 되는 기본적인 내용도 있으나 한국 역사와 사회를 알아야 하는 어려운 문제가 많아서 공부 시간이 자꾸 늘어나고 있단다. 이번에도 역시 애국가 이야기가 나왔다. 영희씨가 숨죽여 애국가 4절을 다 불러서 박수까지 받았는데 “그런데 ‘이 기상’이 뭐예요?” 하더란다. 둘이서 한참을 웃었다. 막상 설명하기도 쉽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암기했는지 신기하다고 했다.

정종운 서울 구로구가족센터장

이제 유관순 열사와 이순신 장군은 외웠으나 오만원은 신사임당, 만원은 세종대왕, 오천원은 이율곡, 천원은 이황이란 이름은 여전히 오락가락한단다. 이미 돈 벌고 살림하고 아이 키우면서 국민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통과 의례치고는 괜하고 고약하다. 증발해버릴 정보들을 붙잡아 두느라 애쓰고 있다.

귀화 시험은 국적을 부여하고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국가와 권리를 보장받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개인의 의지가 만나는 자리이다. 그러니 쌍방이 서로 만나는 형식과 내용이면 좋겠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국민에게는 어려서부터 배우고 경험하고 느끼면서 축적된 것이지만 이제 겨우 한국어를 습득한 사람에겐 시험이라는 형식 외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혼이민 비자로 생활하는 여성들이 귀화를 선택하는 상황과 시기는 각기 다르다. 엄마 이름에서 다문화가정이 묻어나지 않게 아이들 학교 가기 전에 ‘김하나’, ‘이지은’, ‘한정은’으로 개명까지 하면서 귀화를 선택하는 여성들이 있다. 비자 연장이라는 번거로운 절차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도전하지 못하는 여성도 있고, 국적을 변경하고 싶지 않아서 귀화가 아닌 영주권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다 각자의 상황과 시기에 맞는 선택을 하고 있으니 존중받아야 한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부지런하고 살뜰하게 이주민의 무게까지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국적을 얻고 국민이 되어도 그들 앞에 붙은 ‘결혼이민자’, ‘귀화자’가 여간해선 분리되지 않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렇게 애를 썼는데도 말이다. 고마움과 환대와 응원을 전하는 통과 의례는 안 되는 걸까?


정종운 서울 구로구가족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