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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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반도체 보조금 빌미로 영업기밀 요구한 美 처사 과도하다

반도체지원법을 앞세운 미국의 횡포가 도를 넘고 있다. 미 상무부는 27일 반도체 기업 보조금 신청 절차 안내를 통해 자국 보조금을 받으려면 반도체 핵심 재료인 웨이퍼 종류별 생산 능력, 가동률, 예상 웨이퍼 수율(생산품 중 정상품 비율), 생산 첫해 판매 가격 등을 엑셀 파일 형태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한 달 전 초과이익 정보 공유보다 더 ‘깐깐한’ 심사를 예고한 것이다. 수율은 반도체 제조 경쟁력의 주요 지표이자 영업기밀이다. 여기에다 공장 운영자, 엔지니어, 관리자 등 전체 직원의 유형과 급여, 마케팅 비용, 연구개발(R&D) 비용 자료까지 내도록 했다. 사실상 반도체 생산과 공장 운용·경영 전략에 대한 데이터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50조원의 보조금을 앞세운 미 정부의 요구가 국제적 금기를 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따져보면 기업들로 하여금 대놓고 영업·기술 기밀을 미국으로 넘기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미국 내 투자 기업을 돈만 대는 허수아비로 전락시키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수집한 핵심 정보들을 자국 반도체 성장에 활용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자초했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미국의 첨단기술이 중국에서 군사 목적으로 활용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게 이유라고 강변하지만 믿기 힘들다. 오죽하면 미국 내에서조차 미·중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동맹국들의 선택과 희생을 강요한다는 비판이 나오겠는가.

미국의 요구안을 그대로 받아들일 기업이 과연 몇이나 될지도 의문이다.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대만 TSMC는 7나노(㎚·1나노는 10억분 1m) 이하 최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에서 독보적 기술력을 보유 중이다. 핵심 기밀 공개도 문제지만,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 따른 수율이 제각각이어서 이를 산정하기조차 쉽지 않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중간선거 참패를 막은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내년 재선을 위해 또다시 동맹국을 희생양 삼으려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

힘의 논리가 판치는 게 국제 관계라지만 이번 처사는 과도하다. 경제·안보 일체화는 시대적 흐름이다. 대승적 차원에서 천문학적 미국 투자에 나선 우리 기업이 이런 대접을 받아선 곤란하다. ‘반도체 탈(脫)중국’은 필요하다. 다만 떠밀리듯이 하는 게 아니라 기업들의 경영적 판단에서 이뤄지는 게 순리라는 걸 미국은 명심해야 한다. 같은 처지에 놓인 대만·일본 등과 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도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정치 논리가 안보 동맹까지 저해한다는 걸 각인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