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국왕님, 죄송해요. 다음엔 꼭 뵈어요!”
즉위 후 첫 국빈방문 대상국으로 프랑스를 선택한 영국 국왕 찰스 3세가 프랑스 국내 사정 탓에 계획을 접은 가운데 총파업 중인 프랑스 노조원들이 ‘미안하다’는 뜻을 밝혀 눈길을 끈다. 프랑스 노조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연금개혁 강행에 반발하며 전국에 걸쳐 시위와 파업을 벌이고 있다. 이에 찰스 3세는 마크롱 대통령의 부탁을 받아들여 프랑스 방문 일정을 잠정 취소했다.
3일 AFP 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 칼레 해안가에 노조원 100여명이 거대한 현수막을 들고 나타났다. 이들은 칼레에서도 손꼽히는 관광명소인 블라네즈 곶으로 올라가 현수막을 펼쳐들었다. 거기에는 영어로 “미안해요 찰스, 다음에 봐요”(Sorry Charles, see you later)라고 적혀 있었다.
블랑네즈 곶은 영불해협 너머 영국 땅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한마디로 영국 왕실, 그리고 국민들이 꼭 봤으면 하는 뜻에서 벌인 퍼포먼스인 셈이다. AFP는 “노조원들은 절벽 꼭대기에서 몰아치는 거센 바람과 싸워야 했지만 결국 해안에서 쉽게 볼 수 있도록 현수막을 펼치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찰스 3세는 원래 3월 26일부터 29일까지 3박4일 일정으로 프랑스를 국빈방문할 예정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찰스 3세가 즉위 후 첫 국빈방문 대상국으로 프랑스를 선택한 점을 크게 반기며 대대적 환영을 준비하고 나섰다. 대통령궁인 엘리제궁 대신 파리 외곽 베르사유궁에서 성대한 국빈만찬을 열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정년을 현행 62세에서 64세로 늘리는 연금개혁안이 확정되며 프랑스는 극심한 내홍에 휩싸였다. 마크롱 대통령은 “연금 수급권자를 줄여 재원을 아끼려면 불가피한 조치”라고 강조했으나 야당과 노조는 물론 일반 시민들도 강하게 반발했다. 수도 파리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노조는 총파업 돌입을 선언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찰스 3세를 위해 베르사유궁에서 개최하려던 성대한 국빈만찬은 실현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찰스 3세는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남동부의 유명한 와인 산지인 보르도를 방문해 유기농 포도밭을 둘러볼 계획이었으나 이 또한 성사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결국 마크롱 대통령은 찰스 3세에게 전화해 극구 사과함과 동시에 “프랑스 방문을 미뤄달라”고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인 찰스 3세는 프랑스를 건너뛰고 지난달 29일 두 번째 국빈방문 대상국인 독일로 직행했다. 프랑스 노조원들이 칼레에서 현수막 퍼포먼스를 펼친 날은 찰스 3세의 독일 방문 이틀째였으며, 그는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의 극진한 환대 속에 영국 군주로서는 처음 독일 연방의회 하원에서 연설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 국내 상황이 진정될 것으로 예상되는 오는 6월 초쯤 찰스 3세의 프랑스 국빈방문을 재추진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AFP는 “찰스 3세의 바쁜 국내외 일정을 감안할 때 6월 초에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