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4일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임기 첫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문제는 이게 윤석열정부의 마지막 거부권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거대 야당이 본회의 처리를 추진 중인 간호법·의사법·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 등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어 윤 대통령의 2, 3, 4호 거부권 행사가 잇따를 수 있는 상황이다.
‘거대 야당의 법안 단독 처리→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는 내년 총선을 1년여 앞둔 여야의 각각 다른 셈법 탓에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여당은 야당의 입법 독재를, 야당은 윤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로 판단하면서 양당 모두 정치적으로 손해볼 것 없는 상황이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이날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따라 재의결 절차를 밟겠다고 밝혔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 대응할 것”이라며 “국회법은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하면 본회의 재표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부로부터 재의 요구된 법률안이 이송되면 절차에 따라 재표결에 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재표결 하더라도 실제 재의결 가능성은 희박하다. 헌법 53조에 따르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을 다시 의결하려면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하다. 민주당과 정의당, 야권 성향 무소속 의원 전원이 찬성표를 던져도 가결은 어려운 게 현실이다. 115석인 국민의힘이 당론으로 부결 투표에 나서면 재의결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이 재의결 절차를 밟겠다고 나선 건 현 상황이 정치적으로 불리할 게 없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양곡관리법 개정안 자체가 농민이라는 이해관계자가 있는 민생법안인 터라 정부·여당의 거부권 행사·부결 투표로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게 당 지도부의 생각이다. 박 원내대표는 “저희는 용산 대통령실의 소위 하명에 따라 국민의힘이 일사불란하게 부결을 행사한다면 거기에 대한 평가는 고스란히 우리 국민, 농민, 역사로부터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정치적 셈법이 민주당의 법안 단독 처리의 동력이 되는 형국이다. 당장 간호사 역할·업무를 기존 의료법에서 떼어내 새로 정하는 간호법이 조만간 본회의에 부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란봉투법도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지만 야당 주도로 본회의에 직회부될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 영향력 축소를 골자로 하는 방송법 개정안은 최근 본회의에 직회부됐다. 민주당 지도부 관계자는 “여당이 국회 내에서 이들 법안에 대한 협의에 적극 나서지 않은 채 윤 대통령이 매번 국회가 처리하는 법안마다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정치적 부담을 져야 하는 건 정부·여당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당은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거대 야당의 폭주를 부각할 소재로 활용하고자 하는 모습이다. 내년 총선이 나가오는 상황에서 ‘정권심판론’이 아니라 ‘거대 야당 심판론’을 작동할 명분이 될 수 있어서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서 “민주당이 원안을 재추진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것에는 ‘대통령이 민생에 거부권을 행사한다’는 프레임으로 현 정부를 계속 공격하겠다는 정치적 의도가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도 이날 “여소야대 상황에서 이런 무리한 법을 막을 방법은 재의요구권밖에 없다”며 “(앞으로도) 절차나 법안 내용을 봐서 법안이 의도한 대로 실행되지 않고 국민에게 주는 부담과 폐단이 많은 법이라면 계속해서 (거부권 행사 건의를)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결국 여야의 이런 정치적 득실에 따른 입장 차로 감소세를 보이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사례는 앞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날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제6공화국(1988년 이후) 기준으로 노태우 대통령 7건, 노무현 대통령 6건, 이명박 대통령 1건, 박근혜 대통령 2건에 이은 17번째 거부권 행사 사례로 기록됐다. 김영삼·김대중·문재인 대통령은 한 건도 행사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 이전 국회 재의결을 거쳐 법률로 최종 확정된 건 ‘노무현 대통령 측근 특검’ 관련 법률안 1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