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산불로 큰 피해가 우려됐다가 11일 8시간 남짓 만에 주불이 잡힌 뒤 찾은 강원 강릉시 난곡동은 화마가 휩쓸고 간 상처를 심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숲속에 잇던 펜션 수십 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철제 울타리는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펜션 귀퉁이에는 액화석유(LP)가스통이 불탄 모습으로 있어 자칫했으면 대형 폭발로 이어졌을 것이란 우려를 낳았다. 난곡동 인근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풍을 타고 민가로 빠르게 확산한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민가 밀집지역에서도 시커멓게 타버린 건물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바닥에 내려앉은 철제 구조물과 벽돌만이 그곳에 건물이 있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여전히 잔불이 남아있는 곳에서는 검은 연기와 매캐한 냄새가 퍼져 재발화를 우려하게 만들었다.
이재민 등 이번 산불 피해자들의 아픔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날 저녁 산불 대피소가 자리한 아이스아레나에서 만난 한 피해자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이번 산불로 “초등학교 6학년 시절부터 살았던 집을 잃었다”며 “산불 발생 초기부터 집이 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발화지점에서 50m도 안 되는 곳에 거주하는 70대 주민은 “아침에 불 나는 걸 보고 농사용 경운기를 가져와서 불을 껐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더라고…”라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전했다. 그는 “‘지금 못 잡으면 불길을 잡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직접 불을 껐다”고 했다. 본인 집은 화마에서 살아남았지만 그는 “불에 탄 (다른) 집들을 생각하면 죄 지은 마음”이라면서 집이 전소된 이웃들에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앞서 강릉산불통합지휘본부가 ‘주불 진화’ 사실을 알린 이날 오후 4시쯤 지휘본부가 차려진 강릉녹색도시체험센터에선 안도감이 묻어나왔다. 지휘본부의 이광섭 강원도산불방지센터 소장은 “강한 산불의 기세에 모두가 마음을 졸였는데 주불이 진화됐다”며 반가운 소식을 알렸다. 산불 확산에 연신 가슴을 졸이던 본부 관계자들은 주불 진화 소식에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들은 “정말 다행이다”, “고생했다” 등의 안도와 위로의 말을 쏟아냈다. 잠시 숨을 돌린 이들은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이 소장은 “가만히 서있기도 힘들 정도의 강한 바람이 분 탓에 산불이 빠르게 번졌다”며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는데 현장 관계자들이 함께 노력해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산불은 자칫하면 대형 산불로 번질 수 있었다. 한 소방대원도 “최근 출동한 산불 중 가장 규모가 컸다”며 “한동안 집에 못 들어갈 각오를 하고 왔는데 주불이 잡혀서 다행”이라고 털어놨다. 지휘본부 안팎에서는 주불이 잡힌 상황이지만, 곳곳에 잔불이 여전히 존재해 우려를 씻지 않고 있다. 영동 지방에는 12일에도 강풍이 예보된 상태다.
본부는 오전 10시4분쯤 강릉녹색도시체험센터에 차려졌다. 산림청과 강원도, 강릉시, 강원소방본부, 육군 제8군단, 공군18전투비행단 등 관계기관이 빠르게 모였다. 강원도의 산림면적은 145만㏊다. 녹음이 우거져 한 번 불이 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산불 노이로제’가 극심한 지역인 만큼 현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단비 등의 덕택으로 주불이 잡히면서 산불본부도 ‘6시간 26분’ 만에 해산했다.
이날 산불로 인명 및 재산 피해 못지않게 문화재 피해도 컸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강원도 유형문화재인 ‘강릉 방해정’ 일부가 소실됐다. 경포호 주변에 있는 작은 정자인 상영정과 사찰 인월사는 전소됐다.
불길이 한때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인 경포대 근처까지 번졌지만, 큰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경포대 인근의 주불과 잔불은 모두 진화된 상태여서 추가 피해는 없을 것으로 기대했다.
앞서 문화재청은 산불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경포대의 현판 7개를 떼 인근 오죽헌박물관으로 옮겼다. 경포대와 국가민속문화재인 선교장에 긴급 살수 작업도 진행했다. 경포대는 동해안 일대의 명승지 8곳을 뜻하는 관동팔경(關東八景) 중 하나다. 경포대와 선교장 외에 강원도 유형문화재인 호해정과 경양사 등도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