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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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1945년 8월6일 미군 B29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자폭탄을 투하해 20여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중 2만여 명이 조선인이다.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그 당시 희생당한 조선인들을 기리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높이 5m에 무게 10t인 비석 뒷면에는 “원폭 투하로 2만여 명의 한국인이 순식간에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다. 히로시마 시민 20만 희생자의 1할에 달하는 한국인 희생자 수는 묵과할 수 없는 숫자다”라고 새겨져 있다. 먹고살기 위해 혹은 강제동원돼 타향에 온 조선인들이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을 중심으로 매년 8월5일 위령제를 지낸다.

히로시마 거주 한인들은 250만엔을 모금해 1970년 4월 평화공원 바깥에 위령비를 세웠다. 당시 민단 측은 공원 내 건립을 요구했지만 히로시마시 당국은 “다른 위령비와 기념비가 많아 더는 허가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노골적인 차별이다. 그럼에도 민단과 일본 시민단체들이 공원 내 이관을 끈질기게 촉구해 1998년 승인을 받아냈다. 이 위령비는 남쪽을 바라보는 다른 위령비들과는 달리 공원의 서북단 끝자락에 자리 잡았다. 위령비나마 우리나라를 향하도록 고려한 것이다.

역대 일본 총리들은 매년 원폭 사망자 위령비 앞에서 열리는 추모식에 참석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150m 정도 떨어진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는 외면했다. 일본 총리 가운데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당사자인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1999년 처음 헌화했다. 당시 평화공원 행사에 참석했던 오부치 총리는 민단 관계자에게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가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정을 바꿔 참배했다. 그외에는 ‘평화주의’를 주창하는 공명당 간부 등이 가끔 찾아오는 정도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오는 19∼21일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한국인 위령비를 참배하기로 했다. 민단은 “일본 총리가 원폭으로 희생당한 재일교포에게 참배하는 건,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라고 반겼다.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 될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기시다 총리가 위령비 앞에서 어떤 말과 행동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