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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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 산불·폭우에 일상 폐허로… 한반도도 예외 아니다 [연중기획-지구의 미래]

재난이 된 이상기후

강릉 산불로 축구장 530개 면적 잿더미
높아진 기온에 겨울 내내 눈 많이 안 와
바싹 마른 낙엽, 숲… 되레 불쏘시개로

4월 홍성·금산·대전서도 화마 몸살
전국 곳곳 대형산불 동시 발생은 처음
폭우·폭염·가뭄… 남의 나라 얘기 아냐
“기상관측 이래 새 기록 계속 경신” 우려

지난달 강원 강릉시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한 지 한 달이 됐다. 강릉 산불은 축구장 약 530개 정도의 산림을 태우고 꺼졌다. 화마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다. 이재민들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한 삶의 터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울창한 산림은 폐허로 변했다.

10일 산림·소방당국에 따르면 지난달 11일 강릉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주민 1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다쳤다. 산림 379㏊가 불길에 소실되는 등 재산 피해는 398억4600만원으로 집계됐다. 주택 등 건축물 226동과 저온저장고 등 농업시설 122동이 전소 또는 반소됐고 농작물 9.2㏊, 가축 268마리, 꿀벌 300군 등이 사라졌다. 정부부처와 강원도·강릉시는 이달 중 2차 재해조사 결과를 내놓을 예정인데 피해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대형 산불 발생 한 달을 하루 앞둔 10일 강원 강릉시 경포 호수 주변 산림이 벌겋게 죽어가고 있다. 강릉=연합뉴스

◆단순 사고로 넘길 수 없는 대형 산불

당장 드러난 인적·물적 피해보다 더 심각한 건 자연 피해다. 지난달 강릉시 난곡동 야산에서 시작된 불은 건조한 날씨와 강풍으로 순식간에 도심을 위협했다. 불길은 동해안의 대표 관광지인 경포도립공원과 경포해변 인근까지 번졌다. 벚꽃이 가득했던 경포 호수 근처의 소나무숲 또한 일부가 화염에 그슬렸다. 소나무 7만1850그루와 활엽수 1만5450그루가 사라졌다.

강릉을 상징하는 소나무가 오히려 ‘불쏘시개’가 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소나무는 기름 성분인 송진을 머금고 있어 한번 불이 붙으면 아무리 물을 쏟아부어도 잘 꺼지지 않는다. 송진이 연료가 돼 나무 전체로 불길이 번진다. 이번 강릉 산불 때처럼 송진을 품은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리해 숲을 이루고 있다면 작은 불씨조차 대형 산불로 번질 수 있다.

강릉 산불의 시작은 강풍에 쓰러진 소나무가 고압전선을 건드리면서부터였다. 화재 당일 초속 29m의 강풍에 넘어진 소나무가 전신주에 설치된 고압전선을 끊었고, 이때 스파크가 튀어 발화가 일어났다. 소방헬기조차 뜨기 힘들 정도인 강풍과 건조한 날씨 등으로 초동진화에 애를 먹었고 산불이 급속도로 번져 완전 진압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번 강릉 산불 사태를 계기로 다양한 산불 대응 및 예방 대책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안전사고 재발 방지 대책뿐 아니라 기후변화를 고려한 산림 재구조화 등의 장기적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창우 숭실대 교수(소방방재학)는 “기후변화로 인해 산불이 한두 달 정도 더 길어졌다”며 “기온 상승 등으로 겨울에 눈이 오지 않아 산불 발생이 잦아졌고 앞으로는 더 자주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통상 12~3월에 자주 발생하는 산불은 최근 들어 그 기간이 11~4월로 두 달 더 늘어났다. 겨울에 쌓인 눈이 봄에 녹으며 자연스레 낙엽 등에 불이 붙지 않도록 하는 환경이 조성되는데, 기후변화로 기온이 높아지다 보니 메마른 낙엽들이 되레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산불 역시 기후위기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올해 대형 산불이 발생한 건 강릉 화재가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충남 홍성·금산, 대전, 전남 함평·순천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은 서울 여의도 면적의 약 9.7배(2831㏊ 추정)의 산림을 태웠다. 홍성 산불은 53시간 동안 진행돼 1454㏊의 임야를 태웠고 금산 산불의 경우 752㏊의 산림을 태운 뒤 대전 서구까지 번졌다. 함평과 순천 산불은 각각 475㏊와 150㏊의 피해를 입혔다. 산림청에 따르면 피해면적이 100㏊ 이상인 대형 산불이 동시에 진행된 건 1986년 산불 통계 발표 이후 처음이다.

9일 강원 강릉시 경포동 산불 피해 주택 앞에 한국전력을 비난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강릉=연합뉴스

◆이상기후가 야기한 ‘낯선 한반도의 모습’

유례없는 재해는 이뿐이 아니다. 지난해 8월 서울 등 수도권에는 100여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서울 동작구의 경우 하루 새 400㎜에 가까운 비가 내렸다. 기상청 자동기상관측장비(AWS)에 따르면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기상청 관측소의 지난해 8월 8일 강수량은 381.5㎜였다. 최근 30년간 서울의 7월 합계 강수량이 322.7~488.6㎜인 점을 고려하면 한 달 동안 내릴 비가 하루 새 쏟아진 셈이다. 유희동 기상청장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기상관측 이래 새로운 기록이 계속 경신되고 있는데 이 모든 현상은 기후변화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낯선’ 한반도의 모습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 3월 기상청이 국무조정실·국토교통부·환경부 등과 합동으로 낸 ‘2022년 이상기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이상고온·폭우 등 매우 이례적인 징후들이 여러 차례 관측됐다. 지난해 6월 하순부터 7월 상순까지 전국 평균 기온은 26.4도로 기록됐고 전국적으로 이른 열대야와 폭염이 발생했다. 지난해 8월에는 중부지방에 평년강수량(282.6㎜)의 2배가 넘는 비가 내렸다. 남부지방에선 가뭄이 227.3일 지속돼 1974년 이후 최장 기록을 갈아치웠다.

한반도 이상기후는 이제 누구나 체감하는 일상이 됐다. 동아프리카의 극심한 가뭄에 따른 식량 위기, 유럽의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 증가 등은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조윤진 세계자연기금(WWF) 기후에너지팀장은 “기후변화는 매일 나타나는 게 아니라 조금씩 변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체감하기 어려운 편”이라고 말했다. 온실가스 배출 등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요소들이 장기간에 걸쳐 이상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조 팀장은 “우리나라 역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기후위기를 체감할 수 있다”며 ”기후변화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은 없다“고 강조했다.


이민경 기자 m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