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7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7주기 추모행동’이 열렸다. 서울여성회를 비롯해 34개의 여성단체, 시민단체, 진보정당 등이 공동주최했다. 안전한 성평등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연대의 의지를 담은 추모 공연과 발언,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180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누구도 우리의 전진을 막을 수 없다’ ‘퇴행을 거슬러 페미가 바꾼다’가 적힌 플래카드를 흔들며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기억의 힘은 강하다”고 외쳤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정다혜(29)씨에겐 7년 전 귀갓길이 그러하다. 정씨는 중간고사를 앞두고 늦은 시간까지 공부에 열을 올리고 도서관을 나섰다. 그날따라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정씨는 우산을 한쪽 어깨에 받친 채 평소처럼 음악을 듣고 휴대폰을 확인하며 집으로 향했다.
시곗바늘은 오전 12시를 가리켰다. 평일 늦은 밤 거리는 한산했다. 당시 정씨가 살고 있던 다세대 연립 주택은 1층 현관문까지 서너 개의 계단이 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문을 열려던 순간, 누군가 뒤에서 정씨를 끌어내렸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진 정씨의 치마 속으로 불쾌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비명을 지르는 정씨의 입을 틀어막고 남성은 도망쳤다. 이튿날 경찰 수사로 검거된 남성은 휴가를 나온 20대 군인이었다. 그는 바로 강제추행 혐의를 시인했다. 피의자의 부모는 300만원을 주겠다며 합의를 제안했다. 정씨는 거절했다. “합의해주면 그런 괴물들이 계속 나타날 것 같았어요.”
그날 이후에도 정씨의 일상은 변함없이 흘러가는 듯했다. 학교를 가서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웃고, 슬픈 영화를 보면 울었다.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일상이었다. 하지만 집에 가는 길이면 정씨의 온 감각은 예민해졌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걸음을 재촉했고, 수시로 주위를 살폈다.
7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정씨의 일상에는 여전히 막연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흐른다. 자신과 유사한 경험을 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뉴스를 통해 연일 쏟아지고, 귀가가 늦는 동생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자신을 발견한다. 동생 잘못이 아니란 걸 알지만 동생의 안전을 바라는 마음에서 자꾸 모진 소리가 튀어나온다.
◆“다시는 강남역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강남역 여성살인 7주기 추모 물결
바로 그해 ‘괴물’은 또 나타났다. 정씨의 바람은 무색했다. 2016년 5월17일 서울 강남역 근처의 한 주점 건물 공용화장실. 30대 남성 김성민이 일면식도 없는 20대 여성 A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0시33분 화장실에 들어간 김성민은 여성이 들어오기를 오전 1시7분까지 기다렸다가 범행을 저질렀다. A씨와 마주치기 전 들어온 남성 6명은 그냥 보냈다.
김성민은 경찰 조사에서 “평소 여성에게 무시당해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그날부터 7년이 흐른 이날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추모와 연대의 물결을 만들었다.
이날 발언에 나선 참가자들은 ‘강남역 여성살인사건’이 갖는 각자의 의미를 되새겼다. 과거에 자신이 겪은 성희롱·성폭력의 경험을 나누며 서로에게 위안과 용기를 줬다.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 소속 현아씨는 “2016년에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지만, 강남역 10번 출구는 제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며 “강남역 살인사건은 사회구조적 시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였고, 그 누구도 여자, 장애인, 노동자, 퀴어 등의 이유로 죽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문지현 서울지역 인권연합동아리 연대사업국장은 “길을 지날 때 누가 따라오는지 확인하게 되고, 혹시나 불법촬영 카메라가 있지 않을까 싶어 화장실 가는 것도 피하게 되는 일상이 피곤했다”며 “차별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지만 차별은 우리의 변화와 실천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참여해 여성 폭력에 대항해 연대하는 모습도 눈길을 끌었다. 정치하는 엄마들 소속 오은선씨는 “돌봄노동을 하면서도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살았지만,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 신당역, 인하대 사건들은 이 사회가 여성을 어떤 존재로 취급당했는지 보여줬다”며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가 아니고 평등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고 강조했다.
서울여성 페미니즘 대학생 연합동아리 소속 이다경씨도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는 세상 앞에서 바꿔왔고 바뀔 것이다 라고 말하는 선배 언니들이 있었다”며 “이들과 함께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보인다”고 외쳤다.
여자친구를 기다리며 집회를 지켜보던 정은택(30)씨는 “지금까지 여자친구와 페미니즘 관련 대화를 나누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는데 결혼을 한달 앞둔 지금은 (페미니즘을) 가족과 관련된 문제로 보고 있다”며 “아직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지만 개인과 구조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성 폭력 방관하는 국가가 공범” 윤 정부 규탄 목소리 활활
이날 시민들은 윤석열 정부가 지난 1년간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하며 ‘여성’ 지우기에 힘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지아 서울여성회 부회장은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이후 7년의 시간을 보내고 2023년이 됐지만, 윤석열 정부는 지난 1년동안 노동자, 장애인, 세입자 등에 대해 국가가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무를 저버렸다”며 “특히 피해자를 위한 예산이 줄어들고, 여성의 안전은 방기하는 등 여성 인권이 퇴행했다”고 지적했다.
홀로 집회에 참석했다는 김혜진(30)씨도 “여성가족부 폐지 등 사회적 약자들을 지우는 윤 정부의 퇴행적 행보들이 여기로 오게 만들었다”며 “여성가족부 폐지는 대표적인 여성혐오 정책으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원은 줄이면서 부자 감세는 감행하는 윤 정부의 행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40대 박미경씨는 “여성들이 일상이나 일터에서 차별받는 걸 온몸으로 느끼는데, 윤 정부는 우리 사회에 구조적 차별이 없다고 한다”며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에 대한 혐오가 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알려준 사건이었다”고 강조했다.
발언을 마친 참가자들은 여성의 삶을 퇴행시키는 그림을 소개하며 그 위를 색색의 포스트잇으로 채웠다. 그림에는 ‘여성가족부는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고 말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사진과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N번방 사진 등이 있었다. ‘더 이상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이지 않는 세상으로!’, ‘조롱과 혐오의 사회가 되지 않도록’ 등이 적힌 포스트잇이 모여 ‘바꾼다’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경희대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 소속 박나원씨와 윤민정씨는 각각 포스트잇에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슬픔’과 ‘추모하고 연대하겠다’고 적었다. 이어 그들은 “집회를 통해 우리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연대의 의미를 나누고 서로를 환대할 수 있었다”고 참여 소감을 밝혔다.
추모 물결은 온라인 공간에서도 이어졌다. ‘강남역 살인사건 7주기’ 추모 메시지를 올리는 온라인 게시판에는 115여개의 글들이 올라왔다. ‘당신에게 따듯하고도 거센 불길이 깃들기를’, ‘잊을 수 없고 잊히지 않게’, ‘우리가 살아남아 세상을 바꾸겠습니다’ 등의 문구가 게시판을 채웠다.
한편 이날 주최 측으로부터 50여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신자유연대 등 보수단체가 맞불 집회를 열기도 했다. 열 명 남짓의 참여자가 모여 “시민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페미들은 죽음을 이용하지 말라” 등 고성과 야유를 쏟아내며 경찰과 충돌했다. 이에 주최 측은 “쓸모없는 열정을 쓸모있는 열정으로 맞서겠다”며 의연히 집회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