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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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칼럼] 기시다가 가야 할 아데나워의 길

과거사 반성, 진정성 더 보여야
엘리제 조약 佛·獨 윈윈 성공작
韓·日, 관계개선 노하우 배우고
NCG 참여·G8 가입 서로 돕길

“나는 귀하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 찾아왔습니다. 프랑스와 독일 국민은 역사상 처음으로 양국을 완전한 우호관계로 재정립할 수 있다는 입장에 이르렀습니다. 문제는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관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귀하의 목적이 두 나라의 진정한 화해라면 나도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나치 피해자 배상에 적극적이던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가 1958년 9월 프랑스를 방문해 샤를 드골 대통령을 만나 한 말이다. 1870년 이후 보불전쟁, 제1차·2차 세계대전을 치른 구원의 양국 관계를 개선하려는 강한 열망이 녹아 있다. 드골 대통령이 공감을 표시했음은 물론이다. 두 정상은 이후 4년간 약 40통의 편지를 주고받고 열다섯 차례 회동해 100시간이 넘는 대화를 가졌다. 그 결실이 1963년 엘리제 우호조약의 체결이다.

김환기 논설실장

엘리제 조약은 외교·교육·문화 등 전 분야에 걸친 양국 간 포괄적 협력관계를 규정하고 정상회담과 외무장관 회담을 정례화했다. 또 유럽연합(EU)과 유로화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다. 엘리제 조약은 신의 한수였다. 우방이 된 양국이 EU를 이끄는 쌍두마차로서 글로벌 지도국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점을 보면 성공작임이 틀림없다. 과거사 문제로 78년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이웃국가’로 지내온 한국과 일본에 주는 교훈이 작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새로운 한·일 관계 구축의 의지가 강하다. 엘리제 조약 체결 과정을 면밀히 살펴 노하우를 배우기 바란다. 당시 프랑스와 독일 상황은 과거사와 국제정세, 지도자의 관계개선 의지 면에서 한·일의 현재와 유사했다. 냉전시기 두 나라는 전쟁 재발을 막고 공산권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적대관계를 청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한·일 간에도 북·중·러 등 권위주의 국가들과 미국, 유럽 등 자유민주주의 국가 간 신냉전이 격화해 가치연대가 시급하다. 무엇보다 북핵의 위협을 받는 공통점은 안보협력의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희토류, 반도체, 배터리의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위한 협력도 절실하다.

국가 지도자들의 상호 신뢰와 국제정세 통찰력은 관계개선의 필수 조건이다. 한·일이 과거사의 강을 빨리 건너려면 두 지도자의 전략적 결단과 신뢰에 기반한 비전 제시가 필요하다. 식민지배 피해자들을 보듬는 일은 가해국인 일본의 의무다. 지난 7일 “강제동원은 가슴 아픈 일”이라고 유감을 표명한 기시다 총리는 21일에도 윤 대통령과 함께 일본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했다. 양국 정상의 공동참배는 처음이고 미래를 향한 의미 있는 첫걸음이지만 사죄나 반성의 표현이 없어 아쉬웠다. 식민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보다 더 직접적인 사죄를 해야 옳다. 언제까지 반성을 모르는 전범국 멍에를 뒤집어쓰고 있을 건가.

외교는 국익을 놓고 말로 하는 전쟁이다. 주고받기를 잘해 국익을 극대화하는 게 최선의 외교다. 아데나워 총리는 엘리제 조약 논의과정에서 독일의 재통일 권리 인정과 국제적 위상 회복 지원을, 드골 대통령은 현 국경선 존중과 핵무장 용인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일본은 북핵의 대응력 강화와 반도체 경쟁력 회복이 최대 관심사다. 한·미핵협의그룹(NCG) 신설을 부러워하며 새로운 한·미·일 NCG를 희망한다. 한국의 협조가 필요한 사안이다.

한국은 북핵 확장억제 강화와 G8(주요 8개국) 진입에 대한 관심이 크다. 경제력, 군사력, 민주주의 발전 수준을 감안하면 G8 진입 자격이 충분하다고 본다. G8 합류는 국가 위상을 끌어올릴 호재다. 중국, 러시아도 지금처럼 쉬이 보지 못할 것이다. 이번 히로시마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에선 논의가 없었지만 글로벌 선도국 역할을 확대하면 길이 열릴 것이라는 게 정부 판단이다. 양국 간 신뢰가 쌓이면 일본의 반대 입장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일은 NCG 참여와 G8 진입을 서로 도와 국익을 키우는 선택을 해야 한다. 양국의 관계 개선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윈윈 게임이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기시다 총리가 아데나워 총리의 길을 뒤따르는 역사적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김환기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