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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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법망에… ‘상장피’ 판치는 코인거래소 [심층기획-가상자산, 조작된 고수익의 유혹]

(하) 불법에 눈감은 가상자산거래소

유통물량현황 확인 등 실효성 의문
계약서에도 “전적으로 발행사 책임”
외부 평가기관 형식적 감사도 문제

블록체인 기술 ‘투명성’ 강조해 놓고
정작 거래소 내부 거래내역 비공개
개인 지갑과 달리 압수수색 거쳐야
“기술에 대한 검토요? 일절 없었어요. 백서를 써서 거래소에 가지고 갔거든요. 제가 그래도 전문가다 보니까 제 백서에 빈틈이 좀 보이잖아요. 근데 그런 건 거래소에서 하나도 안 묻더라고요. 수월하게 상장했어요.”

코인발행사 전 대표 A씨가 밝힌 상장 일화다. 백서는 코인 발행사가 코인의 청사진을 소개하는 문서로, 코인의 방향성과 사업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기술검증을 쉽게 마친 A씨 회사는 3년 전 국내 대형 거래소 중 한 곳에 코인을 상장했다. ‘거래소 심사가 까다롭지 않았다’는 A씨의 고백은 충격적이다.

 

“거래소가 상장을 안 시켜주면 발행사에서 장난을 칠 수가 없잖아요. 상장을 해줌으로써 거래소가 (불확실한) 코인의 경제·사회적 가치를 인정해주는 꼴이 되어버리는 거죠.” 강성후 한국디지털자산사업자연합회장이 울분을 토하며 말했다. 강 회장은 부실 업체를 무분별하게 받아주는 거래소를 강하게 비판했다. 강 회장은 “코인 업계에선 발행사를 재단이라고 부르는데, 이 ‘재단’은 인원수가 7~8명 정도인 초등학교 동창회만도 못하다”며 “(살펴보면) 아무런 실체가 없고, 사업을 추진할 의도도 없는 코인이 대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왜 제대로 된 청사진을 갖고 있지 않은 업체의 코인이 계속 거래소에 상장되는 걸까. 거래소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본지는 23일 국내 5대 가상자산거래소 중 한 곳의 상장 계약서를 입수했다. 상장 계약서는 상장에 대한 발행사와 거래소의 의무 등을 규정해둔 서류로, 코인 상장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계약서에 따르면, 상장을 원하는 발행사는 거래소에 △백서 △체크리스트 △기술검토보고서 △유통물량현황 확인서 △윤리서약서 5가지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거래소는 이 같은 서류를 받은 뒤 자체 심의위원회를 거쳐 코인을 상장시킨다.

본지가 23일 입수한 국내 5대 가상자산거래소 중 한 곳의 상장 계약서

위 제출 서류 중 가장 중요한 건 발행 이유와 유통량, 향후 계획 등 코인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백서다. 하지만 한국에선 백서만 보고 옥석을 가려내기 쉽지 않다. 백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내용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아서다. 여러 백서를 살펴보다 보면, 기술에 대한 설명보다는 ‘그럴듯한’ 청사진만 펼쳐놓은 백서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상자산 관련 사건을 전문으로 다루는 진현수 변호사(디센트법률사무소)는 “한국에선 백서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지 정해진 게 없다”며 “여러 백서를 보다 보면 정형화된 형식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고 했다.

한국과 달리 유럽은 백서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법으로 꼼꼼히 규정해뒀다. 지난달 유럽연합(EU)이 통과시킨 ‘가상화폐시장법(MiCA)’은 백서에 발행자 명칭과 기관식별코드와 같이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발생 가능한 이해상충 문제 등에 대해서도 서술하도록 했다.

 

◆“사업 의도조차 없는 코인 많지만 상장이 가치 인정해준 꼴”

 

거래소가 코인의 기술성과 사업성 등을 적절하게 관리하고 있는지 의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기술검토보고서는 필수 제출 서류지만 상장 계약서엔 기술검토보고서에 어떤 내용이 포함돼야 하는지 명시돼 있지 않았다. 거래소가 받는 유통물량현황 확인서의 실효성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코인 발행사들이 코인 발행 후 익명의 지갑을 여러 개로 쪼개서 관리하기 때문에 거래소 입장에선 유통량이 지켜지는지 관리하고 감시하기 어려워서다. 상장 계약서에도 ‘재단은 회사(거래소)가 유통물량현황을 일일이 검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위반하지 않도록 할 전적인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문장이 삽입돼 있다.

 

◆檢 “외부 평가기관, 형식적 감사”

 

최근에는 거래소가 업무협약을 맺은 외부 평가기관들에 대한 중립성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본지가 확인한 국내 한 거래소 상장팀이 발행사에 보낸 이메일에는 “평가기관을 말해주면 해당 기관에 연락해 평가자료를 직접 받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심사를 하는 기관이 평가를 하는 기관과 직접 소통을 하겠단 의미다.

 

서울남부지검도 최근 외부 평가기관의 형식적 감사를 지적했다. 거래소가 코인 발행사에 외부 평가기관으로부터 받은 감사결과서를 필수 제출하도록 요청하고 있는데, 거래소와 외부 평가기관의 유착이 확인됐다는 취지다. 검찰은 “실제로는 상장 브로커를 통해 재단(발행사)을 특정 감사업체에 연결하고 형식적인 감사결과서를 받아 이를 거래소에 제출하게 했다”며 “감사업체로부터 상장 브로커가 리베이트를 받아 거래소 상장 담당자와 분배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의혹을 받아온 외부 평가기관 쟁글은 전날 “평가 결과에 대한 타협도 없었으며 평가 이후 상장에 대한 기대를 대가로 뒷돈을 주거나 받는 행위는 단 한 번도 없었다”며 공시 서비스를 잠정 중단했다. 쟁글은 “영업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생각했던 ‘잠재 평가 대상 재단 소개에 대한 대가 지급(지급평가 비용의 약 10% 수준)’이 최근에 어떤 대가성이 있는 리베이트로 오해받았다”며 “명확한 규제 환경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그간 진심과 애정을 담아서 시작하고 운영했던 공시와 평가 서비스를 중단한다”고 해명했다.

 

◆“상장하려면 돈 내” 유착 관계 만드는 상장피

 

발행사가 거래소에 상장 대가 성격으로 건네는 것으로 알려진 ‘상장피’도 고질적 문제로 지적된다. 국내 5대 거래소는 상장피를 수수하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지만 업계에선 상장 시 발행사가 거래소에 상장피를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본지가 입수한 한 코인 발행사의 텔레그램 대화에서는 “OOO(거래소)에서 10비트코인을 요구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내용이 파악됐다. 진 변호사는 “업무를 하다 보면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상장피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검찰이 최근 코인원 직원 2명과 상장브로커 2명을 뒷돈 상장을 한 혐의로 구속기소하면서 상장피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전 코인원 직원 2명은 2019년 12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현금과 비트코인, 리플 등으로 29억8000여만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전 코인원 직원들이 뒷돈을 받으며 코인원에 상장시킨 가상자산이 피카코인 등 29개 이상인 것으로 판단했다.

 

◆거래기록 안 남는 거래소?

 

거래소의 투명성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블록체인 기술은 모든 거래내역을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강점을 갖지만 중앙화한 거래소상에서는 그 기록을 볼 수 없다. 거래소가 통합된 지갑으로 투자자들의 가상자산을 모으고 내부 거래가 일어나면 자체 데이터베이스(DB)를 통해 거래를 관리하기 때문이다. 거래소 입장에서는 실제 고객이 돈이나 가상자산을 출금할 때 오차 없이 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이 같은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다. 최근 무소속 김남국 의원을 둘러싼 가상자산 논란에서도 내역이 공개된 개인 지갑과 달리 거래소의 거래내역은 감춰져 압수수색을 통해 확인이 이뤄져야 했다.

 

전문가들은 거래소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한국거래소는 법적으로 여러 기준이 정해져 있지만 가상자산 거래소는 그렇지 않다”며 “국가에서 (규제나 관리 등을) 하나도 안 하고 내버려두니 거래소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당국도 ‘입법의 불비(不備)’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 중이다. 이날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서 토론회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가상자산 불공정거래와 관련, “국회에서 신속한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고 저희도 최대한 지원하고 있다”며 “피해자들을 위해 금융당국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또 저희가 지원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심도 있게 내부 검토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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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이희진·안승진·조희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