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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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죽고 나만 살아 가슴 찢어져”.. ‘강릉 급발진 의심사고’ 첫재판서 할머니 오열

쌍용차 상대 7억6000만원 손배 청구한 사고 차량 운전자·가족 등 원고 측 “전형적인 급발진” 거듭 주장
운전자 할머니 법정서 “제 과실로 사고 냈다는 누명 쓰고 죄책감에 살 수 없다” 호소
유족 측 사고의 정확한 원인 규명 요청하는 탄원서 1만7000여부 제출
지난해 12월6일 발생한 강릉 홍제동 급발진 의심 사고 장면. 당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다 공중으로 치솟은 뒤 배수로로 추락했다. 유튜브 채널 ‘한문철 TV’ 갈무리

 

지난해 12월 강원 강릉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사고로 12살 남아가 숨진 가운데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의 첫 재판이 5개월 만에 열렸다. 운전자인 남아의 할머니는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 사고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민사2부는 23일 급발진 의심 사고 차량 운전자와 가족들이 제조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의 첫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앞서 유족들은 “자동차의 결함으로 발생한 급발진 사고였다”며 지난 1월 10일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사고 차량 제조사인 쌍용자동차 측에 손해배상액 7억6000만원을 청구했다.

 

원고 측은 이번 사고가 차량의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 사고였다고 주장했다.

 

원고 측 소송 대리를 맡은 하종선 변호사는 “이 사건은 급발진의 전형적인 4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며 “‘웽’하는 굉음과 머플러(소음기)에서 흘러나온 액체, 도로상 타이어 자국과 흰 연기가 있고, 블랙박스 동영상에는 차량의 오작동 차량의 결함이 있음을 나타내는 운전자의 생생한 음성들이 녹음돼 있다”고 밝혔다.

 

이어 “30초 가량 가속 페달 오조작 가능성에 대해서는 인체공학적 분석과 경험칙에 반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재판부는 원고 측이 법원에 신청한 속도 감정(사고기록장치)과 음향 감정 등 2건의 감정을 모두 받아들였다. 원고 측은 사고 5초 전 차량의 시속이 110㎞인 상태에서 분당 회전수(RPM)가 5500까지 올랐으나 거의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과 가속 페달을 밟았다는 국립과학수수연구원의 사고기록장치(EDR) 검사 결과가 모순되는 점을 통해 EDR의 신뢰성 상실을 증명하고자 감정을 신청했다. 정상적인 급가속 시 엔진 소리와 이번 사고에서의 엔진 소리 간 음향 특성이 다른 점 등을 밝히고자 음향분석 감정도 신청했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로 12살 손자를 잃고,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된 60대 할머니가 지난 3월20일 첫 경찰조사를 마치고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경찰서를 떠나고 있다. 강릉=연합뉴스

 

이날 첫재판에 참석한 자동차 제조사 변호인 측은 국과수의 사고 원인 조사가 나온 뒤 상세히 반박을 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다음 기일을 정하면서 “이 사건은 소장이 접수된 것이 1월이고 벌써 5월이 됐고, 그 사이 기일 통지를 했지만 피고 측에서 소송에 대해 뭔가 신속하게 대응을 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며 “그 부분은 피고 측이 감수해야 하고, 원고가 신청한 증거는 다 채택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내달 27일을 다음 변론기일로 지정하고, 이때 전문 감정인을 선정해 감정에 필요한 부분을 특정하기로 했다.

 

이날 열린 첫 변론기일에서 재판부는 사고 당시 운전했던 A(60대)씨와 그의 아들에게 발언권을 부여했다.

 

A씨는 “사랑하는 손자가 죽고 저만 살아서 너무 미안하고 가슴이 찢어진다”며 “누가 일부러 사고를 내 손자를 잃겠느냐”고 오열했다.

 

아울러 “제 과실로 사고를 냈다는 누명을 쓰고는 죄책감에 살아갈 수 없다”며 “재판장이 진실을 밝혀주길 간절히 바란다”고 하소연했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의 첫 재판이 23일 오후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열렸다. 사진은 전국에서 모인 탄원서 1만7000여부 현황. 강릉=연합뉴스

 

A씨의 아들은 호소문을 통해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겨온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자동차 급발진 사고”라며 “급발진 사고의 원인을 전적으로 운전자에게 입증케 하는 자체가 모순된 행위이며 폭력”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제조사의 이권과 횡포 앞에 국민의 소중한 생명의 가치가 도외시돼야 하냐”며 “대한민국에서 급발진 사고는 가정파괴범이자 연쇄살인범”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나아가 “부디 이번 사고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 주고 대한민국은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사회라는 것을 국민 모두에게 알려주기를 부탁드린다”며 “이번 소송이 급발진 사고에서 승소한 첫사례가 돼 다시는 제조사가 방관하고 묵과하지 않도록 법 개정이 반드시 이뤄질 수 있도록 국회의원에게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유촉 측은 이날 재판부에 사고의 정확한 원인 규명을 요청하는 1만7500부 가량의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앞서 지난해 12월6일 오후 4시쯤 강릉시 홍제동의 한 도로에서 A씨가 몰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도로 옆 지하통로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해 함께 타고 있던 손자(12)가 숨지고, A씨는 다쳤다. 이 사고로 A씨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돼 지난 3월 경찰 조사를 받았다.

 

이후 유가족들은 지난 2월 국회 국민동의 청원에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결함 원인 입증 책임 전환 제조물책임법 개정에 관한 청원’을 게시했고, 해당 청원은 국민 공감을 사면서 5일 만에 국회 소관위원회 및 관련 위원회 회부에 필요한 5만명을 넘어 국회에서 관련법 개정 등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게 됐다.


김수연 기자 sooy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