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레이카르트, 뤼트 휠릿, 엣하르 다비츠….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수리남 혈통이라는 점이다. 레이카르트의 경우 수리남 말고도 인도, 아프리카, 네덜란드인의 피가 섞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는 동명의 넷플릭스 드라마로 친숙해진 카리브해 국가 수리남의 근현대사를 보면 그가 다양한 혈통을 지닌 이유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1634년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서인도회사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납치한 이들을 중남미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보내 노동력을 착취하고 부를 축적했다. 식민지로 삼은 수리남에는 1667년 이후 약 20만명의 노예가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노예무역이 1873년 중단된 후에는 인도, 인도네시아 등지의 계약 노동자들이 유입돼 공백을 메웠고, 동북아와 중동 출신 이민자들까지 합류하면서 수리남은 인종의 용광로가 됐다.
마르크 뤼터 총리는 지난해 12월 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노예제 종식 149년 만의 일이었다. 사과 찬성 여론은 38%에 불과했지만, 다문화 사회의 통합을 위해서라도 사과가 필요하다고 봤다. 뤼터 총리는 노예를 “소처럼 취급한” 역사가 “추악하고, 고통스럽고, 완전히 부끄럽다”며 “정부는 노예가 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겪은 엄청난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
국제 뉴스를 다루다 보면 이런 과거사 관련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지난 3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19세기 창간 주도 인사들의 노예무역 연루 사실이 확인됐다며 “비인도적 범죄에 대해 피해 공동체와 생존 후손들에게 사과한다”고 했다. 지난달, 독일 대통령은 폴란드에서 열린 유대인 강제거주지역 봉기 80주년 기념식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달 초, 호주 등 12개국의 원주민 정치 지도자 등은 찰스 3세 영국 국왕에게 노예화, 자원·문화재 약탈 등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이들이 수백년 전 일에 사과하거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정부에 앞서 사과한 위트레흐트 시장은 “노예제는 지금도 그 후손들의 일상에 영향을 주고 있다”며 “오늘날 위트레흐트 시민들이 그에 관련된 것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과거의 반인륜적 범죄를 직시하고 사과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일본 정부는 어떤가. 얼마 전 방한한 기시오 후미다 총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했다. 제3자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다. 하긴 윤석열 대통령이 먼저 “100년 전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으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면죄부를 주는 듯한 언급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일본 극우 신문은 과거 한국 정권이 ‘사과 외교’를 했다고 나무란다. 적반하장이다.
이게 과연 과거사에서 비롯된 양국의 앙금을 털어내고 미래지향적 관계를 맺는 과정일까. 소녀상, 교과서, 욱일기, 독도 등 숱한 문제에 관한 자민당 정권의 억지 주장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독일 대통령의 언급과 비교하게 된다. “역사적 책임에는 끝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