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팔아도 이미 집값이 떨어져서 손해를 봐야 하는 데다 의무 임대기간 종료 전에 집을 처분하면 채당 3000만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해서 좋을 게 없어요. 차라리 파산하는 게 낫죠.”(임대사업자 유모(66)씨)
최근 전셋값이 떨어져 집주인이 신규 세입자의 보증금으로 기존 세입자의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역전세’가 급증하고 있다. 임대인 10명 중 2명은 역전세가 발생할 시 파산을 신청할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임대인과 임차인이 동반 위험에 내몰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31일 세계일보가 전국임대인연합회 회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역전세가 발생할 경우 임차인에게 반환해 줄 보증금을 어떻게 마련할 계획이냐’는 질문(복수응답)에 19.8%가 ‘파산 신청’이라고 답했다. 설문에는 임대인 100명이 익명으로 참여했고, 한국도시연구소·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와 함께 유효답변 97개를 분석했다.
보증금을 ‘여유 자금에서 충당하겠다’고 답한 비율은 30.2%였다. 임대인 10명 중 3명만 역전세를 감당할 여유 자금이 있는 셈이다. 설문에 답한 임대인 100명의 평균적인 상황을 보면, 이들이 보유한 임차인 보증금(7억2676만원) 중 역전세로 인해 반환이 불가한 금액은 5억574만원에 달했다.
임 교수는 “역전세 발생시 파산 신청 비율이 20%라는 점을 보면 앞으로 전세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 “임대인이 파산 신청을 고려하는 건 (역전세로)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해 다른 자산까지 채권 추심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다. 이들이 파산하면 임차인은 보증금 일부밖에 돌려받지 못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벼랑 끝 내몰린 임대인들
세계일보 설문조사에 따르면 임대인 10명 중 8명은 역전세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임대사업에 뛰어들었다고 응답했다. ‘역전세 발생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냐’는 질문에 인지했다는 답변은 21.9%에 그쳤고, 나머지 78.1%는 인지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역전세를 생각하지 못하고 무리한 갭투자에 나섰던 임대인들은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이다. 임대인들은 “부동산 대책이 급변했다”며 “정부가 임대인을 파산시키고 있다”고 곡소리를 냈다.
2018년 말부터 3개월 동안 서울과 인천의 주택 11채를 매입했다는 임대사업자 정모(46)씨는 “당시만 해도 정부가 양도소득세·재산세·종합부동산세 혜택을 주면서 임대사업을 장려했다”며 “세제 혜택이 있을 때 노후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3억원을 대출받아 미친 듯이 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근데 갑자기 세금을 걷기 시작하더니 이제 역전세까지 만들어 사기꾼 취급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년 전 종부세를 내기 위해 반지하 집에 들어갔다는 최영주(가명·58)씨는 “세금 혜택이 있었을 때는 임대사업이 ‘환상적’이라고 생각했다. 2억원이 있으면 집 한 채를 매입하는 것보다 2000만원씩 10채 갭투자 하는 게 나았다”고 말했다. 최씨는 현재 빌라 80채를 갖고 있다. 그는 “지금은 역전세로 파산 위기에 놓여 있다”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절대 임대사업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126% 룰’이 임대인 파산 부추겨”
전세보증보험 한도를 공시가의 126%로 제한하는 ‘126% 룰’에 대한 불만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정부는 올해 들어 깡통전세를 예방하기 위해 공시가율과 전세보증보험 한도를 공시가의 126%로 하향 조정했는데, 임대인들은 기존 150%에서 126%까지 낮추는 건 가혹하다고 불만을 제기한다.
임대사업자 김모(75)씨는 최근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임차인 A씨에게서 “전세 계약을 갱신하고 싶은데 전세자금대출을 연장하려면 5000만원을 갚아야한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는 “5000만원을 내어 주라는 건데, 갑자기 5000만원을 어떻게 마련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오는 6월 A씨의 대출금 1000만원을 대신 갚아주는 조건으로 전세 계약을 연장할 계획이었다. 정부가 올해 들어 전세보증한도를 기존 공시가격의 150%에서 140%까지 낮추면서 1억6000만원이었던 전셋값이 1억5000만원 수준으로 떨어졌고, A씨의 전세대출 한도도 1000만원이 줄었다. A씨는 대출 문제만 해결되면 계약을 연장하고 싶다고 밝혔고, 김씨도 얼어붙은 전세시장 속에서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기보다는 기존 세입자가 남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달 들어 전세보증보험 기준이 전세가율 100%에서 90%로 하향되며 문제가 생겼다. 전셋값이 공시가의 150%에서 126%(140%×90%)까지 내려간 것이다. 전세대출 한도는 80%였기 때문에 A씨가 계약을 갱신하기 위해서는 5000만원이 필요했다. 김씨는 “1억6000만원짜리 전셋집이 한순간에 1억원 초반대까지 내려갔다”며 “구청에서 일주일에 3일 2시간씩 일하고 있지만 5000만원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임대인 ‘출구 전략’ 마련될까
세계일보 조사에서는 올해 역전세로 인해 임차인에게 돌려주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보증금이 인당 평균 5억574만원으로 조사됐다. 이는 평균치일 뿐, 미반환 예상 보증금의 범위는 임대인의 주택 보유 수와 보증금 규모에 따라 폭넓게 나타났다. 올해까지는 미반환 예상 보증금이 없다거나 3000만원 수준이라고 답한 이들도 있었다. 반면 반환할 수 없는 보증금이 60억원에 달하는 임대인도 2명이나 있었다. 이들이 보유한 주택은 아파트 5채와 오피스텔 75채, 빌라 30채와 오피스텔 20채였다.
임차인들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전셋집에 살고 있는 직장인 오모(29)씨는 “역전세 얘기가 나오니까 두렵긴 한데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임대인의 채무 상태라도 확인하려고 매달 등기부등본을 떼 보고 있다”고 한숨지었다.
임대인들은 보증금을 반환할 수 있게 전세퇴거대금대출(보증금 반환대출)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보증금 반환 목적의 대출에 대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 규제를 완화해 달라는 것이다.
전문가들 의견은 분분하다. 권지웅 더불어민주당 전세사기고충접수센터 공동센터장은 “보증보험 한도를 낮추는 건 필요한 일이었다”면서도 “그에 따라 역전세를 겪는 임대인이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정부가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임대인 중 목돈이 없지만, 보증금 반환대출을 받아서라도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며 “임차인이 대환대출을 받기보다 임대인이 대출금을 부담하는 게 맞는다”고 덧붙였다.
반면 지수 민달팽이 유니온 위원장은 “임대차 시장에서 보증금을 제때 안 줘도 된다는 관행이 만연했기 때문에 이런 극단적 상황까지 치달은 건데, 임대업을 할 수 없는 임대인 대출을 풀어주는 건 다음 전세사기를 방치하겠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애초 임대차 시장에 어떤 임대인이 참여할 수 있게 할지 질서를 잡아 가야 하는 시점”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