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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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 수어통역사를 아시나요? [심층기획-말뿐인 공용어…설 곳 없는 한국수어(手語)]

“한국인에게 가장 통역을 잘해줄 수 있는 사람은 한국인 통역사일 거예요. 마찬가지로 농인(주로 수어로 의사소통하는 청각장애인)에게 누구보다 수어통역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농인 통역사예요.”

 

18년째 수어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청각장애인 이목화(48)씨는 농인 통역사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인이라고 한국어를 늘 문법에 맞게 사용하는 건 아니다. 농인도 그렇다. 게다가 농인 중엔 수어가 아닌 몸짓으로 소통하는 이도 있다.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이를 청인(청력의 소실이 거의 없는 사람)에게 통역하는 사람이 농인 통역사다.

농인 통역사 이목화씨가 지난 2일 대전시에서 열린 제27회 전국농아인대회에 참석했다. 이씨는 농인들의 문화가 하나의 독립적인 문화로 인정받길 바란다고 했다. 이목화씨 제공

수어통역센터에는 농인 통역사가 1명씩 있다. 대다수가 이들의 존재를 모르지만 농인 통역사는 ‘수어 원어민’으로서 청인 통역사가 이해하기 어려운 수어도 통역해 낸다. 3일 농아인의 날을 맞아 농인 통역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농인의 수어는 청인의 수어와 다르다

 

이목화씨는 서울 한 경찰서에서 통역 요청을 받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 농인이 가게 밖에 진열된 물건을 가져간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받는데 진술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씨가 가서 보니 그 농인은 수어를 잘하지 못했다. 이씨는 그림과 몸짓으로 대화하며 그와 대화를 시도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은 그 광경을 희한하게 바라봤다고 했다.

 

상황은 이랬다. 그 농인은 물건을 가져간 건 맞지만 누군가 필요 없어 내놓은 줄 알고 가져갔다는 것이다. 가게 밖에 놓인 물건에는 으레 붙어 있어야 할 가격표도 붙어있지 않았다. 파는 물건을 값을 치르지 않고 가져가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자 농인은 그런 줄 몰랐다며 잘못을 인정하고 선처를 구했다. 이씨 덕에 사정을 이해한 재판부도 농인에게 선고유예 판결을 했다. 이씨는 이때가 농인 통역사로서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같은 농인이었기에 수어를 하지 못하는 농인과도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얼마 전까지 수어통역센터에서 농인 통역사로 일했던 김옥미(48)씨는 청인과 농인의 수어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가령 청인은 ‘왜 밥 안 먹었어?’라고 한국어 문장 그대로 수어를 한다면, 농인은 ‘밥 아직 왜?’라고 한다는 것이다. 김씨는 “청인들의 수어는 문장식이라 농인이 청인 통역사의 수어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덧붙였다.

 

농인들이 수어를 구사하는 방식이 각기 달라 청인 통역사가 통역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김옥미씨는 “사람마다 말투가 다르듯이 수어도 사람마다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며 “심지어는 ‘바지’ ‘청소’ ‘체육’처럼 지역마다 수어를 다르게 쓰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구어에서처럼 수어에도 방언이 있다는 것이다. 김씨는 “농인 통역사는 농인과 청인 통역사 사이에서 수어통역을 하기도 한다”고 부연했다.

농인 통역사 김옥미씨가 딸 이다빈(왼쪽·20)씨, 아들 이승헌(19)씨와 함께 ‘I love you’라는 뜻의 수어를 하고 있다. 김나현 기자

◆“수어는 한국어의 대체 언어 아냐”

 

농인 통역사는 청인과 농인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지만 정작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김옥미씨는 “수어통역센터를 이용하는 농인들이 대부분 통역 서비스를 신청할 때 농인 통역사를 선호한다”며 “그런데도 센터마다 1명밖에 없어 농인 통역사에게 업무가 가중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농인 통역사의 역할이 주목받지 못하는 배경으론 음성언어 사용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청능주의(오디즘·Audism)가 지목된다. 김씨는 장애복지학과에 진학한 딸이 대입 면접 때 겪은 일을 들려줬다. 청각장애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농인 통역사라고 답했더니 ‘그게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이냐’고 되물었다는 것이다. 김씨는 “장애 관련 학과 교수인데도 농인 통역사를 모를 수 있구나 싶었다”며 씁쓸해했다.

 

이목화씨는 수어를 장애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것에서 한 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어를 청각장애인이 사용하는 한국어의 대체 언어가 아닌 하나의 독립된 언어로 인식한다면 청인 통역사만큼이나 농인 통역사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씨는 “통역 서비스의 질을 제고하려면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농인 통역사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관련 기사>

 

[심층기획-말뿐인 공용어…설 곳 없는 한국수어(手語)]

 

<상> ‘소리강요사회’ 속 외면받는 수어 교육

 

① [단독] 무늬뿐인 장애학생 통합교육, 특수학교 재학 절반은 전학생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29509059

 

② ‘청능주의의 폐해’… 농인 95%가 10살 넘어 수어 배운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29509101

 

③ 전국 특수학교 192개교 중 농학교는 14곳 불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29509100

 

<중> 수어통역, 법만 만들고 예산은 나 몰라라

 

④ [단독] 한 달 800건 넘게 수어 통역도… 격무에 이직 빈번 농인만 속앓이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0514742

 

⑤ TV자막 아바타수어 번역…예산 부족에 상용화 난항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0514732

 

<하> 문화 빈곤 시달리는 수어 사용자

 

⑥ [단독] 한글 단어에 수어만 연결 ‘반쪽 사전’… “유튜브 보고 배워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1516227

 

⑦ [단독] 청각장애인 10명 중 3명 “1년간 영화관람 못했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1516226

 

<다하지 못한 이야기>

 

⑧ 침묵과 소리의 경계… ‘소리 없이 빛나는’ 코다(CODA)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3504469

 

⑨ 농인 수어통역사를 아시나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3505351

 

⑩ 0.0007%의 기회…장애인·비장애인 ‘같이’ 관람하는 ‘가치봄’ 영화 관람해보니 [밀착취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4500189


윤준호 기자 sherp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