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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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 전봇대 관리인력 태부족… 지중화도 막대한 예산에 답보 [연중기획-안전이 생명이다]

거미줄 전깃줄 ‘머리 위 시한폭탄’

강풍·비바람에 스파크 튀며 굉음·섬광
고압선 절단으로 곳곳 정전·산불 피해
기후변화로 올여름 더 많은 비 우려높아

전국 전주 1012만기… 전선길이 7178만c-㎞
한전 월1회 맨눈검사… 정밀관리 힘들어
전주에 통신선까지 얽혀 안전 더 위협
전선 500m 매립비용 수십억원대 달해

전국 17개 시·도 지중화율 겨우 20% 뿐
서울 62% vs 경북 8%… 재정따라 큰 차

지난 4월4일 밤 서울 은평구 대조동 일대에서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순간 강렬한 불빛이 번쩍거리며 불꽃이 튀어올랐다. TV에서 러시아군이 심야에 우크라이나 도시를 미사일로 공습하는 뉴스에서나 볼 수 있던 상황이 서울 시내에서 발생하자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

 

1~2m 거리에 2만2900V(볼트) 고압선 3개와 변압기 3개가 있다. 연합뉴스

당시 굉음과 섬광은 강력한 비바람이 전주(電柱:전봇대)와 변압기를 때리면서 버티지 못한 고압선이 끊겨나가며 발생했다. 고압선이 절단돼 일대 상가와 주택 등 874가구에 전기 공급이 끊겨 4시간 동안 동굴 속처럼 컴컴한 암흑이 됐다.

 

주민 임모(54)씨가 보여준 영상에는 전선 밑에서 스파크가 튀며 큰 소리와 함께 흰 불빛이 쏟아내는 공포의 장면이 담겨 있다. 주위에선 하얀 연기도 피어올라 화재 위험도 있어 보였다.

 

임씨는 “전쟁이 난 줄 알았다”고 가슴이 쿵쾅거렸던 순간을 전했다. 다른 주민 박모(83)씨는 “그날 비가 많이 와서 처음엔 천둥이 치는 줄 알았다”며 “이 동네에 50년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고 했다.

 

기자가 4일 찾은 대조동 일대는 밀집한 주택가 전봇대 사이로 얽히고설킨 전깃줄 가닥이 거미줄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머리 위의 시한폭탄이 우리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인근 거리가 정리되지 않은 전선으로 복잡하다. 이곳에서는 지난 1월 전선 단선으로 인한 화재로 965가구에 전기공급이 끊기는 사고가 발생했다. 최상수 기자

◆도심과 산야의 시한폭탄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핏줄인 전선은 각종 안전사고의 원인 제공자라는 또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정전 사태를 넘어 화재처럼 사람 생명에 직접적 위험이 되는 각종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4월4일 은평구에선 대조동 외에도 신사동, 불광동, 구산동, 역촌동, 응암동 등에서 화재신고 21건이 접수됐다. 강한 비바람에 전선이 끊어지고, 변압기에서도 문제가 생겼던 것으로 파악됐다. 사고가 난 전선 주위에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고, 병원 등 취약시설도 영향을 받지 않아 추가 피해는 없었다.

 

같은 날 비슷한 시각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에선 230가구가 2시간 동안 정전됐다. 전선을 보호하기 위한 방호관에 빗물이 스며들어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안산시 단원구 와동 일대에서도 비바람에 날린 이물질이 전선에 닿으면서 정전이 발생해 358가구가 2시간 넘게 생활에 큰 지장이 있었다.

 

주민들은 전선과 관련한 크고 작은 사고로 불편을 겪는 것은 물론 불안에도 떨고 있다. 올해 여름엔 기후변화 영향으로 많은 비가 올 것으로 예상돼 이미 정전 피해를 겪어본 지역에선 긴장감마저 감돈다. 대조동에서 만난 김모(69)씨는 “정부, 한전(한국전력)에서 미리미리 대비를 좀 철저히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강원 등 산간 지역에서 발생한 전선 사고는 단순 정전을 넘어 대형 산불로 직결되기도 한다. 4월11일 발생한 강릉 산불의 원인 역시 강풍에 쓰러진 나무가 전선을 끊으면서 불꽃이 튀어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화재로 379㏊(산림 179㏊)가 잿더미로 변하고 1명이 숨졌다. 재산 피해 규모만 398억원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2019년 4월 산림 1267㏊를 집어삼키고, 584가구 1366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강원 고성·속초 산불 역시 강풍에 의한 전선 단선이 원인이었다.

 

2015년 10월 광주 북구 임동 한 마트 공사장에서 강풍으로 무너진 가림막이 전봇대와 충돌하며 폭발하고 있다. 광주=뉴스1

◆머리 위 전선 ‘완전’ 관리 역부족

 

한전에 따르면 전국에 설치된 전주는 1012만기, 전선 총 길이는 7178만c-㎞(서킷킬로미터:선로길이×회선수)에 달한다. 한전은 전주와 전선 등 가공(架空:공중에 설치됨) 특고압 배전설비를 대상으로 월 1회 순시(맨눈 검사), 연 1회 진단(과학화 장비 활용 검사)을 하고 있으나 정밀한 관리를 하기엔 역부족이다.

 

특히 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 사고가 발생할 경우 즉각적인 대응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잦다. 지난달 대조동 정전 때도 한전 은평지사의 인력이 부족해 사후조치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이 은평구 측 설명이다. 구 관계자는 “한전 서대문 은평지사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했는데 유기적 소통이 어려워 구 자체적으로 재난대책본부를 구성해 대응했다”고 말했다.

 

한전 측도 할 말은 있다. 한전 관계자는 “당시 야간당직 3명이 근무하며 대응했다”며 “기상 악화로 인한 정전 다발로 한전 4명, 협력회사 8명, 장비 3대가 긴급하게 추가로 동원돼 복구작업을 시행했다”고 대응에 최선을 다했음을 강조했다.

 

김찬오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명예교수는 “급격한 기후변화로 이전보다 자연환경이 혹독해져 전선 노후화가 심각해지고 있다”며 “기존의 유지·관리 기준과 방법, 비용으로는 사고를 예방하기가 쉽지 않다”고 근본적 대응을 주문했다.

 

전주에 어지럽게 얽혀 있는 각종 통신선도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다. 한전 지침에 따라 통신선은 전선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돼야 하고 최대 수량도 제한되나 지켜지지 않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공포의 전주에 대해 “비상시 소방차나 사다리차 진입을 막아 화재 진압이나 인명 구조작업을 어렵게 만들 수 있어 골칫거리”라고 했다. 한전은 통신사에 위약 추징금을 부과하며 관리하고 있지만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는 실정이다.

 

사진=연합뉴스

◆해법 지중화 사업은 지지부진

 

머리 위의 전선, 변압기로 사고가 계속되자 궁극적 해법으로 전봇대를 없애고 전선을 땅에 묻는 지중화(地中化) 사업이 추진되고는 있지만 비용과 시간 탓에 진행은 더디다.

 

한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전국 17개 시·도의 전선 지중화율은 평균 20%를 겨우 넘긴 상황이다. 전선 500m를 지중화하는 데 드는 비용은 수십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도심을 가로지르는 5㎞ 특고압 송전선로 지중화 작업에 나선 서울 노원구의 경우 전체 투입 예산이 908억원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한전 관계자는 “선로를 땅속에 매설할 경우 가공선로 신설 대비 약 9배 이상의 비용이 든다”며 “가공선로 전체를 지중화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투자재원 확보가 필요하고, 이는 전기요금 상승요인이 될 수 있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부익부빈익빈 식의 지역별 격차도 심각하다. 지중화 사업은 지방자치단체장이 한전에 요청하면 승인을 거쳐 이뤄진다. 한전이 50%를, 나머지 50%는 광역지방자치단체와 기초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한다. 재정 여건이 열악한 지자체일수록 지중화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시·도별로 살펴보면 서울의 지중화율이 61.6%로 가장 높다. 지중화율 50% 이상인 곳은 서울과 대전(57.7%) 단 두 곳뿐이다. 전남(9.4%)과 경북(7.7%)의 경우 지중화율이 10%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의 한 자치구 관계자는 “지중화를 요구하는 민원이 많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점이 많다”며 “막대한 예산이 가장 큰 문제이지만 지자체 간 경쟁도 매우 심하다”고 했다.

 

새로 만들어지는 신도시의 경우엔 상대적으로 지중화 사업이 용이한 편이다. 2005년부터 3만1429가구 규모로 조성 중인 경기 수원시 광교신도시가 대표적인 예다. 광교신도시는 개발 주체인 경기주택도시공사와 한전이 협약을 맺고 단계적으로 지중화 작업을 벌여 현재는 모든 전선이 땅 밑에 매설돼 있다.

 

이용재 경민대 소방안전관리과 교수는 “전부 지중화를 할 수 없다면 결국 사고 예방을 위해 노후 전선을 보수하고 통신선 관리를 강화하는 방법밖엔 없다”며 “가뜩이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한전이 안전관리 비용을 대폭 늘리기 어렵다는 점 역시 시민 머리 위를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한 원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윤모·정재영·김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