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새옹지마 ‘로부스타 커피’에 담긴 의미 [박영순의 커피언어]

입력 :
수정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위기는 스타를 만든다. 커피의 역사에서 ‘로부스타’(Robusta), 학명으로는 ‘코페아 카네포라’(Coffea canephora)가 그런 사례이다. 대체로 로부스타는 맛이 없어서 설탕이나 크림을 섞는 인스턴트 커피 제조에 사용하는 것쯤으로 간주한다. 기온이 낮은 고지대에서 자랄 수 있어 좋은 향미 성분들이 풍성한 아라비카종에 비해 ‘헐값’에 팔리는 형편이다.

그러나 로부스타는 1870년대 커피 녹병이 전 세계로 퍼져 병충해에 약한 아라비카종이 사멸될 위기에 처했을 때 커피를 구해냈다. 당시 녹병의 위세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인류는 커피의 멸종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스리랑카의 경우에는 녹병을 감당하기 힘들자 커피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고 차나무를 심었다. 실론티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로부스타는 ‘다산의 상징’이다. 가지가 처질 정도로 풍성한 열매를 맺은 로부스타 커피나무. 월드커피리서치(WCR) 제공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라비카 커피나무를 찾기 힘들 지경이 됐을 때, 벨기에의 지배를 받고 있던 콩고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로부스타가 발견됐다. 붉은 커피 열매가 한여름 밤의 별처럼 다닥다닥 달리는 바람에 무게를 이기지 못한 가지가 땅바닥에 끌릴 정도였다. 원주민들은 갈대로 엮은 광주리에 열매를 담아 머리에 이고 나르기 바빴다. 카네포라는 이런 놀라운 광경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어원을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구니를 옮기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카네포라는 하위에 다양한 품종을 거느리지만, 모두 로부스타라고 불린다. 브라질에서 재배되는 코닐론(Conilon)은 별도의 품종이 아니라 로부스타를 일컫는 브라질 방식의 표기이다. 카네포라종이 콩고와 가봉 사이를 흐르는 코이루(Kouilou)강 유역의 야생에서 발견된 것을 누군가 코닐론(Konilon)으로 잘못 표기하는 바람에 빚어진 일이다.

아라비카종이 120여개의 품종으로 세밀하게 분류되는 것과 달리 카네포라는 왜 하나로 통칭할까?

우선, 시장에서의 가치 때문이다. 인스턴트 커피 제조 용도로 대량 거래되기 때문에 굳이 맛 차이를 따져 품종을 나눌 필요성이 떨어진다. 커피에서 성분을 추출한 뒤 열을 가하거나 냉동건조를 통해 물을 모두 날려 보내는 방식의 인스턴트 커피 제조 공법을 보면 커피 자체의 맛을 따질 여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 다른 이유는 유전적 복잡성 때문이다. 로부스타가 타가수분을 하기 때문에 한 밭에도 유전자형이 다른 나무를 2개 이상 키워야 한다. 따라서 수확하는 열매의 유전자형이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의 품종으로 부르기에 적절하지 못하다.

커피 녹병의 유행에서 스타덤에 올랐던 로부스타는 아라비카 혈통에서도 녹병을 이기는 교배종이 등장하자 이내 뒤안길로 밀려났다. 하지만 지구온난화와 함께 제2의 전성기를 맞을 태세다.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이번의 인기는 한때의 거품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지구의 평균온도 상승을 억제하지 못하면 커피나무가 2100년에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이 있고, 2050년에는 아라비카종이 자랄 수 있는 땅이 절반가량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더위에 잘 견디고 카페인을 아라비카에 비해 2배가량 많이 품고 있어 병충해를 이겨내는 힘이 강한 로부스타가 다시 위기에서 커피를 구할 희망으로 부상했다. 문제는 맛인데, 품종 개량을 통해 아라비카와 견줄 수 있는 향미를 지닌 로부스타 품종이 개발됐다는 소식이 잦아지고 있다. 또 생두 상태에서 설탕이나 과당을 처리한 뒤 로스팅을 하는 방식으로 맛을 풍성하게 하는 기법이 논문으로 속속 보고되고 있다. 새옹지마를 겪는 로부스타를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치가 있다”는 말이 새삼 진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