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장군이 이끈 한국군과 할아버지가 지휘한 유엔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북한군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했다면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한국이 지금 세계 경제의 리더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북한의 공격을 막아냈기 때문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 주한 미 8군 사령관으로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지휘한 6·25전쟁 영웅 월턴 워커 장군의 손자 샘 워커 2세(70)는 20일(현지시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세네카에 있는 자택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하고 6·25전쟁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꼽았다.
그는 “낙동강 전투가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없었다”고 여러 번 말했다.
워커 장군과 외아들 샘 워커 당시 대위는 6·25전쟁 발발 당시 일본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워커 장군은 7월 대전으로 옮겨와 미 8군 사령관이 됐다. 그리고 8∼9월 6·25전쟁에서 낙동강 전투를 지휘했다.
백선엽 장군이 후에 “나는 지옥의 모습이 어떤지는 모르나 이보다 더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고 했을 정도로 치열한 전장이었다. 워커 장군은 그 전투를 지휘하며 “지키느냐 아니면 죽느냐(stand or die)”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일명 ‘워커 라인’이라고도 불리는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해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워커 대위는 당시 24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해 38선 인근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였다. 워커 장군은 1950년 12월23일 중공군의 파상 공세를 막아낸 24사단과 27사단을 격려하기 위해 경기 의정부로 향하던 중 현재 서울 도봉역 인근에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전과를 올린 아들 군복에 달아줄 은성무공훈장을 든 채였다.
워커 장군은 한국군 병사가 몰던 군용 트럭과 충돌해 사망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교통사고를 낸 한국군을 사형에 처하라고 지시했지만 워커 장군의 유족이 선처를 호소해 중형을 면하게 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워커 2세는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으려고 했다”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 (사고)에 대한 기억 때문에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성탄절 즈음에 사고가 났기에 이후 워커 가족은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즐겁게 보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워커 2세는 형과 함께 다큐멘터리 작가가 쓴 책을 읽으며 할아버지와 6·25전쟁에 대해 공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형이 웨스트포인트(미 육군 사관학교) 2학년, 내가 1학년일 때 아버지는 웨스트포인트 생도 지휘관이셨다”면서 “하지만 우리 형제는 아버지 대신 책을 통해 6·25전쟁을 배웠다”고 말했다.
워커 2세에게 할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한 한국이나 6·25전쟁을 원망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워커 2세는 “할아버지는 대의(大義)를 위해 돌아가셨다. 그게 그분이 원하셨던 일”이라고 했다. 이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건 사고였다. 그래서 어떤 원망도 없었다”고 손을 내저었다.
워커 2세는 아버지도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아버지는 웨스트포인트에 있을 때부터 훌륭한 생도였다. 그는 자신이 훈련받은 것을 전장에서 적용해 보길 바랐고, 6·25전쟁에 참전했다”고 설명했다.
워커 2세는 6·25전쟁이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는 평가에 동의했다. 그는 “6·25전쟁은 미국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기념일로 선포한 적이 없다”면서 “6·25전쟁이 잊혀진 전쟁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최근 폭스뉴스에서 한국전쟁을 다룬 기사가 있었는데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낙동강이나 부산 인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것에 놀랐다”고 밝혔다.
워커 2세는 “한국에서 복무하면서 한국의 발전을 지켜본 나에게는 한국의 발전과 성공이 곧 한·미동맹의 진정한 의미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는 “한·미동맹은 북한에 대한 공동 억지력뿐 아니라 태평양과 아시아 공동체를 지원하고, 중국의 영향력에 대한 공동 억지력으로 여전히 실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미동맹이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한국 국민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면 미국이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면서 “나는 한국군의 강인함을 지켜봤고, 이는 지난 70년 동안 한국 국민과 한국군이 미국에 보여준 강렬한 메시지”라고 강조했다.
워커 2세는 “역사는 좋은 선생님이고, 70년 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면서 “한·미동맹 70주년은 지난 70년을 되돌아보고 북한과 중국의 침략에도 한국이 어디까지 왔는지, 얼마나 강한 국가가 됐는지, 자유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 국가와 군인들의 희생, 한국군의 희생을 인정하고 그 희생으로 한국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워커 2세는 “우리 가족의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복무와 존경, 그리고 훌륭한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지키기 위한 희생에 대해 말할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4대가 한국과 인연… 워커 가문은
워커 가문은 월턴 워커와 아들 샘 워커, 손자 워커 2세가 명문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고, 이들 모두가 한국서 복무한 적이 있는 미국의 병역 명문가다. 샘은 워커 장군의 장례를 치른 뒤 6·25전장으로 복귀를 호소했지만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샘은 나중에 베트남전쟁에 자원 참전해 무공을 올렸다. 베트남전에서 복귀한 뒤 독일 베를린 주둔 미군사령관 등을 거쳐 1977년 최연소 대장으로 진급했고, 워커 장군과 함께 미 육군 최초로 부자 4성 장군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워커 2세(예비역 중령)는 1980년부터 1981년까지 한국에서 비행사로 복무했다. 워커 2세의 아들 역시 웨스트포인트를 졸업, 한국에서 진행된 훈련에 참가하는 등 우리와의 인연을 이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