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뱅킹 등 정보기술(IT) 발달로 기관 간 자금흐름이 대규모로 신속하게 이뤄지고, 위기 전파 속도도 그만큼 빨라졌습니다.”
통화당국 수장인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한은 창립 73주년 기념식에서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를 언급하며 이같이 진단했다. SVB는 자금 위기가 수면 위로 드러난 지 단 36시간 만에 초고속으로 파산하며 ‘디지털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 실사례로 기록됐다. 여태껏 뱅크런이 직접 은행 창구로 달려가 예금을 인출하는 행위를 의미해왔다면, 이제는 고객들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언제 어디서든 대규모로 돈을 빼내 금융사의 위기로 이어질 디지털 뱅크런 환경이 도래한 것이다.
인터넷뱅킹(모바일뱅킹 포함) 등록 고객 수가 2억명(동일인이 여러 은행에 등록한 경우 중복 합산)을 돌파하고, 은행 입출금·자금이체 서비스 거래 건수의 70% 이상이 인터넷뱅킹으로 이뤄지는 ‘디지털 강국’인 대한민국은 역설적으로 언제든 디지털 뱅크런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특히 지난해 가파른 금리 인상을 거치며 부동산 PF(프로젝트파이낸싱)·가계부채 문제 등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높은 상황인 만큼 철저한 사전 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빨라진 뱅크런 속도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돈을 빼가는 일은 은행 입장에선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고객들이 경쟁적으로 인출에 나서는 건 금융시장 충격이나 은행 신뢰 문제 등으로 예금을 제대로 돌려받기 어려울 것이란 불안감이 퍼질 때 벌어지기 때문이다. 시장에 공포감이 파다해지고 뱅크런이 가속화하면 실제 건전성 문제가 없는 은행일지라도 파산에 이를 수 있다.
뱅크런은 고객으로부터 받은 예금을 다른 사람에게 장기로 대출해주는 은행 영업 구조상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문제지만, 최근 금융권 이슈로 부각된 데는 유례없이 빨라진 ‘속도’가 큰 몫을 했다. 인터넷뱅킹 및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용 확대가 한편으로는 공포의 전이와 뱅크런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SVB 사태를 계기로 체감한 탓이다.
국내 인터넷뱅킹 이용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27일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인터넷뱅킹 등록 고객 수는 2억704만명으로 전년(1억9086만명) 대비 8.5% 늘었다. 지난해 일평균 인터넷뱅킹 이용(자금이체 및 대출신청서비스) 건수 및 금액은 각각 1971만건, 76조3388억원으로 1년 전과 비교해 13.8%, 8.2% 증가했다. 입출금·자금이체 서비스의 경우 전체 거래 건수 중 77.7%가 인터넷뱅킹을 통해 이뤄졌다.
통화당국은 현재 SVB 파산과 같은 사태가 국내에서 발생할 가능성은 작지만, 금융환경의 디지털화에 따른 사전 대비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한은은 지난 21일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정책당국은 새로운 금융환경하에서 디지털 뱅크런에 대응한 금융기관들의 대비 태세를 점검해야 한다”며 “긴급 상황에 대비한 유동성 지원 방안 등을 마련하고 유사시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시장에 과도한 불안 심리가 확산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예금보호 한도 상향·감독 강화해야”
전문가들은 작은 문제가 씨앗이 돼 디지털 뱅크런으로까지 번지는 일을 막기 위해선 우선 고객들이 자신의 예금이 안전하다고 느낄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은행 스스로 충분한 자본 여력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위기 상황 발생 시에는 국가가 빠르게 유동성을 공급해 예금이 보호될 수 있다는 신뢰가 있어야 공포의 전이와 뱅크런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위기상황하에서는 (정부나 중앙은행이) 사실상 예금 전액 보장 효과를 내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다만 사전에 예금을 전액 보장한다고 할 경우 예금자들이 위험한 형태의 금융기관에 예금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 자체는 놔두되, 사후적으로 봤을 때 큰 문제가 없는 금융사만 지원에 나서는 것”이라며 “결국 (국가가) 지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만큼, 감독당국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점검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5000만원인 예금보호 한도를 높이는 방안도 거론된다. 유혜미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 등에 비해 예금보호 한도가 낮은 편”이라며 “금융안정을 담보하기 위해선 예금보호 한도가 실효성 있는 수준으로 상향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최근 비대면 수신(예금) 거래가 늘어난 저축은행 등 비은행예금취급기관에 대한 감독 강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유 교수는 “우리나라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경제 전체에서 비은행금융기관이 차지하는 비중도 점점 커지고 있다”며 “비은행금융기관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면서 유동성 위기 발생 시 한은 등이 긴급하게 유동성을 지원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최근 글로벌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중앙은행의 유동성 지원 대상이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비은행금융기관까지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보고, 대상 기관에 대한 적절한 감독 필요성 등을 제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