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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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살아남기

폭력과 차별에 맞선 오필리아
위기의 순간 삶 속으로 몸 던져

테레지아 모라, ‘오필리아의 경우’(‘이상한 물질’에 수록, 최윤영 옮김, 을유문화사)

우연히 수영장이 주요 공간이거나 수영을 배우러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단편소설을 여러 편 동시에 읽게 되었다. 작가들이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한가지처럼 느껴졌고 그러자 오필리아가 떠올랐다. 오필리아는 엄마와 할머니를 따라 작은 변방의 마을로 이사 왔다. 보수적이며 가부장제에 익숙한 마을 사람들은 여성만 있는 가족을 정상이 아니라며 등을 돌리고 입을 완전히 다물어 버린다. 오필리아의 이름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른다. 수영 선생님이 그녀를 오필리아라고 불렀고, 또래 남자아이들은 그녀를 똥이라고 불렀으며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가족을 파시스트 이방인이라고 불렀으니까. 술집도 교회도 설탕 공장도 그리고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수영장도 하나인 마을. 오필리아의 경우엔 검진했던 간호사가 몸이 너무 약하니 뭐든 운동을 시키는 게 좋다고 해서 여름부터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조경란 소설가

오필리아는 수영장을 가로로 50번씩 헤엄쳤다. 12m 거리다. 수영장 밑바닥에는 폭력적인 말을 사과 씨앗처럼 퉤퉤 내뱉곤 하는 남자애들도 없고 술주정뱅이 수영 선생도, 신부의 말을 흉내 내 너희들은 모두 지옥에 갈 거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없다. 수영하는 동안 오필리아는 자신을 압박하는 모든 것에서 멀어지며 자신의 심장이 어떻게 안전하게 뛰는지도 느낄 수 있다. 수영할 때는 숨을 참아야 하는 것도 배운다. 미시시피 1, 미시시피 2 … 미시시피 100. 숨을 참는 것 못지않게 숨을 쉬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도. 수영 선생은 맥주를 들고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아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전부냐”며 비아냥거리거나 그녀를 물에 띄우기 전에 손대지 말아야 할 몸의 일부를 만진다. 어린 오필리아에겐 누군가 필요하고 조금 나은 어른이 필요하다. 수영장 청소부 아주머니가 그런 선생에게 소리치고, 오필리아에게 말한다. 너희 같은 이방인에게 아무 반감을 갖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오필리아는 고맙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렇게 말한다. 난 적이 아니에요.

수영을 잘하게 되었으나 오필리아는 물에 뛰어들 수가 없어 대회에 나갈 수 없다. 머리로 물에 뛰어드는 건 할 수가 없다. 그런 오필리아에게 “이 안에는 익사라는 죽음이 있고 바깥에는 삶이 있지. 뛰어들어라”라고 말해 준 사람도 청소부 아주머니였다. 동네 남자아이들이 오필리아가 수영을 할 때 쥐를 풀어놓았다. 쥐는 허우적거리다 물속에서 죽었다. 술주정뱅이 수영 선생은 오필리아에게 다이빙하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며 물이 20㎝ 정도밖에 없는 수영장에서 다이빙해 부상을 당했고,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오필리아는 매일 수영을 했다. 살아남고 싶었다. 이 마을에서, 모든 적의와 폭력과 차별 속에서.

‘오필리아의 경우’가 수록된 소설집 제목이 ‘이상한 물질’인 것에 대해서 옮긴이는 이 소설집의 인물들이 이방인, 결손 가족, 장애인, 집시 등 소외된 사람들이며 어떤 집단은 이들을 “사회의 이상한 물질들”로 여겨서라고 보았다. 헝가리에서 독일 소수 민족으로 태어난 작가 테레지아 모라는 이 단편소설로 ‘잉게보르크 바흐만 문학상’을 수상했다. 오필리아로 대표되는 ‘경우’처럼 타자성, 주변성에 대한 인간의 역할,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게 해서이지 않을까. 좋은 소설을 읽고 나면 누군가에게 그 책을 선물하거나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처음 이 단편을 읽고 나서는 누군가에게 천천히 읽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낭독하기 좋은 소설이라고 말해야 할까. 반복되는 현재형의 문장들, 단순하지만 감각적인 표현들이 만들어 내는 언어적 리듬 때문에.

남자아이들은 이제 오필리아의 발에 타르를 묻혀 수영장 속으로 빠트린다. 오필리아는 무겁게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여기에는 익사라는 죽음이 있고 바깥에는 삶이 있으니 뛰어들라는, 청소부 아주머니 말이 떠오른다. 오필리아는 숨을 참으며 몸을 움직였다. 지금까지 배우고 좋아했던 방식으로. 본능의 자유로움이 느껴진 순간 오필리아는 삶 속으로, 물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