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방송 수신료를 전기요금에서 분리해 징수하는 내용의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이 5일 방송통신위원회에서 통과됨에 따라 1994년 도입됐던 전기료 합산 징수 방식이 30년 만에 사라질 처지다. TV 수신료 분리 징수가 현실화하면 KBS는 물론이고 EBS에까지 큰 변화가 생기는 등 공영방송 체계에 지각 변동이 예상된다. 여권에서는 KBS 2TV 폐지 주장까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KBS는 수입 급감이 예상된다. KBS의 지난해 총수입은 1조5305억원이다. 이 중 수신료는 6934억원으로 그 비중이 45.3%에 달했다. 하지만 수신료 분리 징수가 이뤄지면 수신료가 절반 이상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여기에 자체 징수에 따른 비용 증가도 예상된다.
노동렬 성신여대 교수는 “수신료 거부가 급증할 것은 아니지만 이론적으로 4000억원가량, 크게는 6000억원가량 수입이 감소할 것”이라며 “최악의 경우 5∼10년 뒤에는 수신료가 ‘제로’에 수렴할 정도로 낮아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수신료 수입 감소로 재정이 악화할 경우 KBS의 대규모 구조조정도 불가피해 보인다. KBS 지출의 3분의 1가량이 인건비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KBS의 총비용은 1조5423억원으로 이 중 인건비는 4812억원(31.2%)이었다. 올해 편성된 KBS 인건비 예산은 전년도보다 141억원 늘어난 4953억원으로, 총비용 1조5254억원의 32.5%다. 특히 2021년 말 기준 KBS의 1억원 이상 고연봉자 비율은 51.3%에 달하고 2020년 말 기준 연봉 1억원 이상 무보직자가 1500여명에 이르러 방만 경영이 지적되는 등 쇄신 요구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김효재 방통위원장 직무대행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이번 분리 징수안 통과의 이유로 방송의 공정성과 더불어 잘못된 경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김 대행은 “KBS는 2010년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면서 2014년까지 인건비 비중을 29.2%까지 줄이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1500억원이 무보직 KBS 간부들의 월급으로 투입되고 있다”면서 “피 같은 수신료를 고품격 콘텐츠 생산에 투입하는 대신 자신들의 월급으로 탕진하고 있다. 그런데도 KBS는 단 한 번도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한 “KBS의 문제는 언론 자유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저 무능하고 부도덕하며 방만한 경영의 문제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노조와 협의를 해야 하는 인건비 감소는 쉽지 않을 전망이어서 일단 다큐멘터리, 교육 등과 같은 비대중적 콘텐츠가 줄고 대신 ‘돈이 되는’ 예능이나 드라마 제작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노 교수는 “KBS의 자구책은 인건비 축소보다 프로그램 제작에 변화를 주는 방향으로 갈 것 같다”며 “더불어 현재 KBS가 가지고 있는 자산을 어떻게 현금화할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도 높은 KBS 개혁을 주장하는 정치권의 목소리도 높다. 특히 여당에서는 KBS 2TV 폐지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의원들은 지난 3일 공동성명을 통해 KBS가 문재인정부 때 재허가 심사에서 두 차례 ‘점수 미달’로 조건부 재허가를 받은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대로라면 KBS 2TV의 재허가 통과는 장담할 수 없다”며 “일반 방송사와 같이 공정한 방식으로 재허가 점수 미달 시 즉시 폐지하는 것이 정도를 걷는 국가의 책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KBS 2TV의 민영화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시각이 많지만 민영화는 현실적으로 쉽지만은 않다는 의견이 아직은 우세하다.
KBS 2TV 폐지와는 별도로 국민의힘 과방위 소속 의원들은 “TV 수신료 분리 징수는 국민 97%가 찬성하는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며 방통위의 결정을 환영했다. 이들은 “더불어민주당도 2011년 현행 수신료 징수 체계의 불합리한 점을 인정하여 분리 징수를 하기로 한 바 있다”며 “이제 와서 손바닥 뒤집듯이 모든 사실을 숨긴 채 국민을 오도하고 있는 민주당은 정말 국민이 두렵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 지도부는 정치적 이해득실만 따지지 말고 국민 대다수가 요구하는 분리 징수에 맞서겠다는 것인지 공식적인 입장을 즉시 밝힐 것을 경고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반면 야 4당(민주당, 정의당, 진보당, 기본소득당)은 시행령 개정안을 졸속 의결로 규정하고 후과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야 4당은 이날 성명서에서 “한상혁 위원장을 부당 면직시킨 후, 용산 대통령실의 ‘지시’에 따라 김효재 직무대행 체제의 ‘반쪽 방통위’가 공영방송의 근간을 허무는 데 앞장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입법예고 기간에 접수된 국민의 반대 의견과 KBS·EBS·한국전력 등 관계 기관의 반대 및 수정 의견을 깡그리 무시하고, 국회의 입법권도 침해한 오늘의 졸속 의결은 반드시 후과를 치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KBS 수신료 중 3%를 배분받았던 EBS도 작지 않은 피해를 볼 전망이다. EBS는 분리 징수가 되면 연간 배분액 194억원 가운데 140억원 이상 감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에 EBS 측은 “앞으로 더욱 상업적 재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릴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EBS는 “종이값 상승과 학생 수 감소 등으로 교재 판매가 급감하고 있는 데다 지상파 광고 자체가 줄고 있어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해 있다”면서 “수신료라는 공적 재원마저 줄어들면 EBS의 공익적 책무 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집집마다 방문 징수·지로 납부 등 거론… 한전과 빠른 시일내 이행방안 마련해야
방송 수신료 분리 징수로 KBS는 징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커졌다.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이 공포되면 KBS는 한국전력공사와 수신료 징수 방식에 대해 이른 시일 내에 협의해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수신료 징수 방식으로는 직접 징수와 지로 납부 등이 거론되고 있다. 직접 징수는 KBS가 자체 고용한 징수원이 집집마다 방문해 수신료를 받는 방식이다. 1970년대까지 KBS가 운영했던 이 방식은 TV 수신기를 보유하고도 ‘없다’며 수신료를 내지 않는 ‘거짓 해지’를 방지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징수원의 인건비가 수신료보다 더 많거나 그에 준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특히 현행 수신료가 최저시급(9620원)의 4분의 1 수준인 2500원인 점을 고려하면 자체 징수원 고용은 비효율적이다. 대신 한전이 고용한 전기요금 징수원에게 수신료 징수를 위탁하는 방식도 있다. 이 경우 자체 징수원 고용보다는 적지만 추가 비용 발생은 피할 수 없다.
지로 납부의 경우 가구에 납부 고지서를 보내기만 하면 된다. 적십자회비가 대표적이다. 다만 ‘거짓 해지’ 판별이 힘든 데다 지로 발송을 위한 시스템 마련에 별도의 인력과 비용이 든다. 이와 관련해 한전은 기존 전기요금 고지서와 별도의 TV 수신료 고지서를 배부하거나 TV 수신료 부문만 절취선으로 구분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지만 KBS 측은 “아직 논의한 바 없다”고 밝혔다.
일본과 영국의 공영방송사들은 직접 징수 방식을 쓰고 있다. 일본 NHK의 경우 지난달 공고된 2022년 결산 자료를 보면 수신료 수입이 전년도보다 76억엔(약 680억원) 줄어 6725억엔(약 6조400억원)을 기록했다. 4년 연속 감소이며 수신료 계약 건수는 4144만건으로 전년도 대비 11만건 줄었다. 징수율도 78.3%로 3년 연속 낮아진 것으로 파악됐다. 수신료를 1년 이상 지불하지 않은 ‘미수수’는 전년도보다 25만건 증가했다. NHK는 오는 10월 수신료의 10%를 일괄 할인할 예정이다.
연간 159파운드(약 25만8000원)의 수신료를 받는 영국 BBC는 민간 회사에 위탁해 분리 징수한다. 징수된 수신료는 1차적으로 정부 종합 재정으로 편입되고 해당 회계연도 예산 조정법에 따라 문화부(DCMS)를 거쳐 BBC로 이관된다. 다만 BBC의 수신료는 2028년 폐지된다. 수신료 미납을 형사 처벌해 온 데 대해 사회적 논란이 이어지면서 폐지 목소리가 커졌고, 방송 환경 변화와 함께 결국 사라지는 수순을 밟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