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백지화 선언으로 지역 주민 반발이 거세진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이 정치권 진실 공방으로 번지고 있다. 고속도로 노선 변경을 누가 먼저 요구했는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김건희 여사 일가 땅을 언제부터 알았는지를 두고 여야 주장이 맞서고 있다. 대통령실은 “사업 백지화 논란에 대해 기본적으로 국토교통부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라며 선을 그었지만 김 여사의 양평 땅과 고속도로 노선 변경을 둘러싼 논란은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변경된 종점, 근처엔 김 여사 일가 땅
9일 정치권에 따르면 이번 논란의 시작은 더불어민주당의 의혹제기다. 민주당이 국토교통부가 김 여사 일가 땅과 가깝게 고속도로 노선 변경을 추진한 게 아니냐면서 특혜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원 장관은 “민주당이 정치 공세를 벌인다”며 고속도로 건설 계획 백지화를 선언했다. 국민의힘은 논란이 된 고속도로 노선 변경은 “2년 전 민주당이 먼저 추진했다”며 반격에 나섰다.
2017년부터 본격 추진된 서울 양평 간 고속도로의 원래 종점은 양평군 양서면이었다. 하지만 국토교통부는 6년만인 올해 5월부터 종점을 강상면으로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문제는 이 강상면에 김 여사 일가의 땅이 있다는 것이다.
고속도로 노선 변경안이 추진된 건 지난해 7월부터다. 당시 국토부는 타당성 조사를 위해 양평군 등에 검토 의견을 달라고 요청했고 양평군은 8일 만에 기존 노선 외에 2개의 노선을 추가로 검토해 달라고 국토부에 회신했다. 제1안은 정부가 원래 추진하던 고속도로 노선(종점 양서면)이고 제2안은 양평군이 새로 추가한 노선(종점 강상면)이다.
이때까지는 양평군도 원래의 고속도로 노선을 1안으로 국토부에 보냈다. 그런데 국토부가 보낸 2차 타당성 조사 관계기관 협의 요청 공문을 보면 원래의 고속도로 노선 대신, 김 여사 일가의 땅이 인접한 곳으로 종점을 변경한 노선만 등장했다.
공교롭게도 변경된 종점지 500m 이내에는 김 여사 일가의 땅이 있었고, 종점 변경으로 이 땅값이 상승할 가능성도 커진 셈이다. 국토부는 향후 전략환경영향평가를 하면서 변경안과 기존안을 모두 공개할 예정이었다며, 노선이 확정돼서 하나만 공개한 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국힘 “민주도 노선 변경 추진” vs 민주 “나들목만 추가”
이번 논란의 핵심은 국토부가 노선을 바꾼 이유와 대통령실을 비롯해 상부의 압박이 있었는지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이미 2년 전에 지금과 같은 고속도로 노선 변경을 추진했다고 적극적으로 대통령실과 국토부를 옹호하고 나섰다.
민주당 측은 사실이 완전히 왜곡됐다는 입장이다. 2021년 당시 양평군수 등이 강하면에 나들목 설치를 검토했던 건 맞지만, 기존 고속도로 노선을 유지하면서 강하면 지역에 나들목만 추가하는 방안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번 논란이 확대된 데는 원 장관의 사업 백지화 선언도 한몫했다. 원 장관은 “민주당은 자신 있으면 국토부 장관인 저를 고발하라. 그 결과 제가 이 사건 전에 김 여사 땅이 그곳에 있단 걸 조금이라도 인지했거나, 노선에 관여한 사실이 있다면 장관직뿐 아니라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말했다.
변경 추진한 고속도로 노선 종점지 인근에 김 여사 땅이 있었던 걸 전혀 몰랐다는 주장이지만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양평군 병산리에 있는 김 여사 땅에 대해 원 장관에게 질의했었다. 즉 당시 이미 원 장관이 김 여사 땅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게 민주당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원 장관은 “대안 노선이 김건희 여사 집안 땅을 지난다는 사실을 제가 알고 있었다는 가짜뉴스도 퍼지고 있다. 이 또한 황당한 주장”이라고 밝혔다.
현재 김건희 여사 일가는 양평에 총 29개 필지를 보유 중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필지는 이번에 변경이 추진됐던 고속도로 종점 인근에 몰려 있다.
양평군 강상면 병산리 땅 중 기존에 대통령 재산공개로 알려져 있던 12개 필지는 모두 1987년 김 여사 일가가 상속받은 것으로 파악되지만 이 땅 외에 병산리에 있는 다른 땅은 김 여사의 가족회사와 오빠 명의로 2016년부터 2019년 사이에 매입했다. 즉 상속받거나 오래전에 매입한 땅이 대부분이지만, 고속도로 계획이 본격 추진된 2017년 무렵 매입한 땅도 일부 존재한다.
◆민주당 “대통령 처가 카르텔”, 대통령실 “국토부 소관”
현재 민주당의 특혜 의혹 제기에 원 장관이 고속도로 건설 백지화를 선언하고, 확인되지 않은 의혹까지 잇따르면서 혼란이 커지고 있다. 여야는 오는 17일 국토위에서 이번 논란에 대한 현안 질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총선을 8개월여 앞두고 민심에 민감한 대통령 일가 부동산 특혜 의혹 제기로 기세를 올리는 모양새다. 민주당은 이번 논란을 ‘대통령 처가 카르텔’로 규정하고 전날 태스크포스(TF) 구성에 이어 ‘국정조사’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앞서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과 ‘50억 클럽’ 특검을 추진한 데 이어 양평고속도로 노선 변경 의혹을 한 축으로 끌어올리는 모양새다.
박성준 대변인은 “윤 대통령 주변의 카르텔부터 척결해야 공직기강의 확립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속도로 게이트’야말로 대통령이 말한 이권 카르텔의 온상”이라고 비판했다.
장경태 최고위원도 양평군을 지역구로 둔 국민의힘 김선교 의원과 국토교통부, 윤 대통령의 처가를 ‘양평 카르텔’로 규정했다. 장 최고위원은 “국토부 장관부터 조사해서 양평 카르텔을 해체하라”고 촉구했다.
국민의힘은 거세게 반박하고 있다. 국민의힘 미디어법률단은 해당 의혹을 제기했던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을 경찰 고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 처가는 땅 투기를 한 사실 자체가 없었다”며 “서울-양평 간 고속도로 노선은 변경이 확정된 것이 아닌 변경안으로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변경안은 세 가지 안 중 하나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사업 백지화 논란에 대해 “기본적으로 국토교통부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라며 선을 긋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언론 브리핑에서 “야당이 정치적 문제를 제기했고, 양평군민의 목소리도 전달돼 국회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으로 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