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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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원래 덥다?… 사람 잡는 ‘폭염’ 주의 [연중기획-안전이 생명이다]

장마 뒤, 사람 잡는 ‘폭염’

해마다 무더위 심해지는 한반도
온열질환자도 매년 증가하는 추세
최근 10년 연평균 1689명 발생해
환자 절반 이상 ‘더위 먹는’ 열탈진

실외작업자 특히 경각심 가질 필요성
증세 땐 119 신고… 몸 시원하게 해야
자칫 다발성 장기손상·기능장애 초래
“낮에 쉬는 ‘한국형 시에스타’ 논의를”

여름철 더위 관리 어떻게 하나

‘열중증’ 예방 위해 정부 차원 노력
공사현장, 온도 낮추는 장비 쓰기도

# 지난해 7월11일 강원 원주시 흥업면 한 공사현장에서 인부 A(당시 35)씨가 갑자기 쓰러져 심정지 상태로 병원으로 옮겨진 뒤 결국 사망했다. 병원 측은 온열질환(Heat related disease)으로 인한 사망으로 판단했다. A씨는 종일 햇볕에 노출돼 일하면서 체온이 높아졌고 근육 경련, 발열 등의 증상이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급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A씨의 체온은 섭씨 41도에 육박했다. 당시 긴급 출동했던 119 구급대원은 12일 “A씨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졌다는 신고를 받고 갔더니 환자가 바닥에 엎드린 채로 있었다. 호흡과 맥박이 없었다”며 “열을 재봤더니 고열이었다”고 했다.

 

# 전북 김제시 용지면 B(62)씨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해 7월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7월6일 오후 4시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자신의 밭에서 감자를 수확하다 갑자기 어지럼증과 가슴속이 불쾌하고 울렁거리면서 토할 듯한 오심(惡心)으로 쓰러졌다. 낮 최고 기온이 34.7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에 야외에서 장시간 농사일에 매달리다 큰일을 당할 뻔한 것이다. 다행히 마을 주민이 발견해 119구급차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 B씨 “어떻게 쓰러졌는지 기억조차 없다”고 했다.

오락가락 장마가 끝나면 폭염이 다시 시작된다. 기후변화 영향으로 전세계 평균 기온이 관측 사상 최고 기록을 연일 바꿀 정도로 지구가 펄펄 끓으면서 한반도의 더위도 그 어느 때보다 맹위를 떨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뙤약볕 아래에서 아무런 대비 없이 야외활동을 하다가는 최악의 경우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폭염속 무방비 야외활동 땐 생명 위험

 

폭염은 체감온도가 33도 이상인 날이 연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기상청은 하루 최고 체감온도가 33도 이상인 상태가 이틀 이상 지속할 것으로 예상될 때 폭염주의보를 내린다. 또 하루 최고 체감온도가 35도 이상인 상태가 이틀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될 땐 폭염주의보다 높은 단계인 폭염경보를 발령한다. 기존에는 온도계가 가리키는 최고온도만으로 폭염주의보·경보를 발령하다가 습도 등에 따라 인체 부담이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해 최근 체감온도로 발령 기준을 바꿨다.

 

폭염이 지속하면 무서운 것이 열사병, 열탈진, 열경련, 열실신, 열부종 등 다양한 온열질환 발생한다. 우리나라에서 폭염일수가 35일로 가장 많았던 2018년의 경우 온열질환자 4526명이 발생해 이 중 48명이 사망했다. 지난 10년간 매년 평균 1689명의 온열질환자가 발생했다. 일본은 2018∼2022년 5년간 열중증(熱中症)으로 인한 사망자가 연평균 1295명(후생노동성 집계)에 달한다.

 

가천대 길병원 이완형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나라마다 온열질환을 집계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며 “열사병만 봐도 우리나라의 집계가 협의의 개념으로 써서 10분의 1 이상 축소됐다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폭염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한국의 사망자가 훨씬 더 많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완형 교수는 “연속폭염일 경우 폭염이 하루씩 연속될 때마다 온열질환 발생은 148.3건, 사망은 1.58건씩 증가한다”며 “온열노출의 효과는 최대 일주일까지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름은 원래 덥다’가 아니라 ‘더위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통계를 보면 온열질환자의 절반여가 열탈진이고 다음으로 열사병이 20% 수준으로 많았다. 두 질환 모두 메스꺼움, 구토, 두통, 무력감, 어지럼증을 보인다. 열탈진은 여기에 땀을 많이 흘리고, 창백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더위먹었다’는 말이 열탈진에 대한 얘기다.

 

열탈진이 생기면 일단 시원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를 권한다. 열사병은 의식이 없는 심각한 상황으로 즉각적으로 119에 신고해야 한다. 체온을 조절하는 신경계가 외부의 열 자극을 견디지 못해 기능을 상실하면서 다발성 장기손상과 기능장애 등 합병증 동반과 높은 치사율을 보인다. 간혹 땀을 흘리는 경우도 있지만 열사병 대부분은 피부가 건조하고 체온이 40도가 넘어간다.

 

노원을지대병원 응급의학과 김덕호 교수는 “폭염에 장시간 노출돼 현기증, 메스꺼움, 근육경련 등의 증상이 나타나면 통풍이 잘되는 그늘이나 에어컨이 작동되는 안전한 실내로 이동하고, 차가운 물을 마시고 입은 옷은 벗고, 피부에는 물을 뿌리면서 부채나 선풍기 등으로 몸을 식히는 게 중요하다“며 “경련이나 실신, 의식 저하 등의 심각한 증상이 발생하면 바로 119에 신고하는 동시에 즉시 시원한 장소로 이동해 옷을 벗기고 몸을 식혀줘야 한다”고 했다.

◆실내 작업장도 안전지대 아니다

 

온열질환 예방을 위해서는 △낮 12시∼오후 5시 운동·야외 작업 자제 △외출 시 양산·모자 등으로 햇빛 차단 △수분 수시 섭취 △가볍고 밝은색의 헐렁한 옷 착용이 도움이 된다. 심뇌혈관, 고혈압·저혈압, 당뇨병 등 기저질환자는 폭염에 더 취약한 만큼 주의가 필요하다.

 

폭염 예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점은 역시 낮에 야외활동을 자제해야 하는 것이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온열환자 1564명 중 작업장이나 논·밭, 길가, 운동장, 공원 등 야외에서 발생한 사례가 82.2%(1285명)을 차지했다. 집, 실내 작업장, 비닐하우스 등 실내 발생은 279명(17.8%)이었다.

 

실외의 경우 작업장에서 581명(37.1%), 논·밭에서 230명(14.7%)이 발생해 근로자와 농업 종사자가 폭염에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실내외 작업장에서 발생한 온열환자가 708명으로 전체 발생 인원의 45.2%에 달한다는 점에서 근로자의 폭염 대비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하다. 폭염 기간 작업 경험이 없는 미숙련근로자나 고령근로자는 더욱 주의가 있어야 한다. 고온에 신체가 생리적으로 적응하는 열순응(熱順應)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완형 교수는 “우리나라 봄 날씨가 필리핀 사람에게는 추울 수 있고, 캐나다 사람이 우리의 겨울을 춥게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똑같은 환경에서도 열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 (온열)질환 연결 여부가 결정된다”며 “실제로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 건설과정에서 많은 근로자가 사망했는데 대부분 열순응이 부족한 외국인 근로자”라고 했다.

산업안전보건법과 관련 규칙(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등은 폭염시 휴게실·물·휴식시간 보장 등에 대해 규정하고 있으며 중대재해처벌법에도 폭염 관련 조항이 있다. 노무법인 여산 권현진 대표(노무사)는 “2024년 1월 27일부터는 5인 이상 모든 사업장에서 확대 적용되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시행령은 ‘폭염에 노출되는 장소에서 하는 작업으로 발생한 심부체온상승을 동반하는 열사병’을 직업성 질병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폭염으로 사망자 발생시 이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다”면서 사용자의 적극적인 조치를 주문했다.

 

여름철 한반도가 뜨겁게 달구어지면서 한낮에는 잠시 사회적 활동을 중지하는 새로운 접근도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완형 교수는 “스페인처럼 무더위가 심한 곳에서는 시에스타(낮잠 풍습)로 한낮에 사회 기능을 정지시켜버리기도 한다“며 “우리나라도 폭염이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측되는 만큼 한국형 시에스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에어컨 사용 권하는 日, 외출 자제·운동 중지 지침

 

“하교할 때까지 에어컨을 틀어놓으니까 수업시간 중에 추워서 카디건을 입는 애들도 있어요.” 일본 도쿄 신주쿠(新宿)구의 구립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말했다.

 

일본 정부는 해마다 여름이면 전력부족과 에너지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열중증(熱中症)을 예방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적절한 에어컨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절전보다는 사람 목숨이 먼저라는 이유에서다. 열중증은 지나치게 높은 온도와 습도로 인하여 체온 조절이 흐트러져 발생하는 병적 증상이다. 일본 환경성이 제시하는 쾌적한 생활을 위한 적절한 실내온도는 섭씨 28도지만 기온, 습도, 신체상태 등을 고려해 필요할 경우 더 낮추길 권장한다.

섭씨 30도를 넘는 가마솥더위가 기승을 부린 지난 7일 일본 도쿄 신주쿠구 버스정류장 지붕 아래의 그늘에서 시민들이 강렬한 햇볕을 피해 차를 기다리고 있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일본 정부는 여름철에 더위지수(WBGT)를 발표해 주의를 당부한다. 더위지수는 기온, 습도, 일사량 등을 종합해 전국 약 840개 지점에서 개별적으로 산출한다. 33도가 넘으면 경계경보가 발령되고 외출 자제, 운동 중지 등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내려진다. 도심의 온도를 낮추기 위한 도로, 대형 건물 등의 녹화 사업, 이동 중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시설물 증설 등의 대책도 추진 중이다. 더위에 약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집단생활을 하는 학교나 요양시설, 야외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야 하는 공사현장은 더위에 대한 경계수위가 특히 높다.

 

일본 정부가 열중증에 관심을 집중하는 배경에는 여름 날씨가 점점 뜨거워지면서 열중증으로 인한 희생이 계속되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이 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2018년 1581명, 2019년 1224명, 2020년 1528명, 2021년 755명, 2022년(6∼9월) 1387명이 열중증으로 사망했다. 사망자 중 80% 이상이 65세 이상 고령층이다. 일본 정부는 5월 개정된 기후변동적응법에 따라 2030년까지 열중증 사망자수를 2018∼2022년 5년간 연평균 사망자수(1295명)의 절반인 600명대로 낮추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일본 정부는 최대 취약 연령층인 고령자 폭염 대책과 관련해 충분한 수분보충, 온·습도계 설치를 통한 실내환경 수시 측정, 체력강화를 위한 규칙적인 운동과 함께 주변의 관심을 강조하고 있다. 환경성은 ‘열중증 환경건강 매뉴얼’에서 “수분보충이나 에어컨의 온도 조절 등을 고령자 본인에게만 맡기지 말고 주변 사람들이 지원해야 한다”며 “가족이 없거나 따로 사는 경우 주변인의 협력, 간병서비스 등을 통해 지켜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주활동 무대인 학교에서는 실외나 온도가 쉽게 올라가고 환기가 쉽지 않은 체육관 등에서의 활동에 크게 주의를 기울인다. 히가시오츠(東大津)고 등 시가(滋賀)현 학교들은 3년 전부터 운동회를 학교 운동장이 아닌 냉방이 좋고 햇볕을 막아주는 현립 실내체육관에서 진행한다.

 

뙤약볕 아래서 힘든 노동을 장시간 해야 하는 공사현장에서는 체감 온도를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는 각종 장비가 활용된다. 공기를 순환시키는 회전판이 부착돼 체온을 낮추는 공조복, 신체기능 향상을 도와 작업 강도를 낮추는 기능성 의류 콤프레션 등이 대표적이다.


정진수 기자, 원주·전주=배상철·김동욱 기자, 도쿄=강구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