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스로 안정 국면을 걷나 했던 국내·외 식품 물가가 다시 불안해지려는 조짐이 엿보인다. 전국에 쏟아진 ‘극한 폭우’로 농지 3만여㏊가 물에 잠기면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해외에선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연장 거부로 국제 곡물 가격이 급등하며 세계 식량 안보 위기가 현실화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번 집중호우로 피해 신고가 접수된 농지 면적이 18일 오전 6시 기준 3만1064.7㏊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여의도 면적(290㏊)의 107배에 달한다.
피해 농지 중 침수된 농지가 3만319.1㏊로 대부분이고, 침수 농지 중 2만2314.6㏊는 벼 재배지다. 지역별로는 전북이 1만4572.3㏊, 충남 1만329.7㏊, 충북 2571.5㏊ 등의 순으로 피해 규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집중호우로 가축 약 69만3000마리가 폐사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폐사한 가축 중 닭이 64만4000마리로 대부분이고, 오리가 4만5000마리, 돼지와 소가 각각 3200마리, 300마리다.
농지와 축사 피해가 이어지면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농산물유통정보(KAMIS)에 따르면 애호박(20개) 도매가격은 4일 전보다 63.3% 상승했다. 오이(37.0%), 적상추(35.4%), 시금치(20.1%), 수박(17.9%), 복숭아(12.8%) 등도 줄줄이 가격이 인상됐다.
폭우 전까지만 해도 농산물 물가는 비교적 안정세에 접어들었다는 평가였다. 채소류 물가상승률은 지난 3월 13.8%에서 4월 7.1%, 5월 6.9%, 6월 3.6%로 상승 폭이 줄어드는 추세였다. 하지만 최근 폭우로 농축산물 가격 상승 압력이 전체 물가 주요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집중호우가 계속될 것으로 예보되면서 농산물 가격은 더욱 오를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일부 농산물의 경우 생산량 감소로 비싼 가격이 유지돼 추석 물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사과의 경우 앞서 이상 저온과 우박 피해 등으로 생산량이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번 집중호우로 재배지 130.8㏊가 침수된 것으로 집계됐다.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서 외식물가 등 전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애그플레이션’ 가능성도 제기된다. 지난달 외식물가 상승률은 6.3%로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2.7%)을 크게 웃돌고 있다. 유제품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원유(原乳) 가격도 물가에 영향을 미칠 공산이 크다. 낙농가와 우유업계 간 원유 가격 협상 2차 마감 시한이 19일로 다가온 가운데, 낙농업계는 사료값과 인건비 상승을 이유로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강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제 밀 가격도 러시아의 협정 무효 선언으로 들썩거리고 있다.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 연장 거부를 선언한 17일(현지시간) 미국 CNN방송 등에 따르면 이날 미 시카고상품거래소(CBT)의 밀 선물 가격은 3% 올라 부셸(곡물 중량 단위·27.2㎏)당 6.81달러(약 8590원), 옥수수 선물 가격은 0.94% 상승한 부셸당 5.11달러를 기록했다.
국제사회는 이번 협정 중단이 전 세계의 식량 가격 인상과 개발도상국의 기아를 악화하는 도미노 현상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 밀 수출의 10%를 차지하는 세계 5위의 밀 수출국이자, 보리·옥수수·유채유의 세계 3대 수출국 중 하나다.
협정 중단 여파는 개발도상국에 가장 먼저 들이닥칠 전망이다. 국제구조위원회(IRC)의 동아프리카 지역 책임자인 샤슈왓 사라프는 CNN에 “동아프리카 곡물의 약 80%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수입되고 있다”며 “올해 식량 가격이 40% 가까이 급등해 5000만명 이상이 기아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올해 엘니뇨(해수 온난화) 등으로 인한 이상기후에 따른 흉작이 이어져 이미 세계 식량 안보에 경고음이 켜진 상황인 것이 더 큰 문제다. 중국의 경우 밀 수확 철인 5월 허난성 일대에 쏟아진 폭우 등의 영향으로 올해 여름 밀 수확량이 전년 대비 0.9%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