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안의 세계사/키스 베로니즈 지음/김숲 옮김/정재훈 감수/동녘/1만8000원
수천년 전 고대 수메르인과 바빌로니아인은 통증과 염증 완화, 해열에 버드나무 껍질을 사용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뿐 아니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류머티즘 통증 완화와 갑상선종 치유에, 그리스에서는 산통과 눈 통증 완화를 위해 버드나무 껍질을 활용했다. 로마군은 출정 시 어마어마한 양의 버드나무 껍질을 가져가기도 했다고 한다. 버드나무 껍질에 있는 고농도의 살리실산으로 인한 효과를 다양한 지역에서 활용한 것이다.
살리실산의 ‘약제화’는 19세기 들어서 본격화한다. 독일 약리학자가 버드나무 껍질에서 살리신을 추출했고, 이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안정적인 아세틸살리실산이 합성됐고, 마지막으로 부작용인 복통까지 없앤 후에 비로소 완성품이 나왔다. 바로 아스피린이다. 중국에서만 매년 최소 1200억개가 생산되는, 진통·해열·항혈전제의 대명사 같은 존재다.
신간 ‘약국 안의 세계사’는 이렇게 인류의 건강을 혁명적으로 바꾼 15가지 약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아스피린 외에 인류를 구한 곰팡이인 페니실린과 말라리아를 정복하게 한 퀴닌, 조울증을 치료한 리튬, 최초의 우울증 치료제인 이프로니아지드 등의 역사와 개발 과정을 만날 수 있다. 디곡신, 클로르디아제폭시드, 아산화질소, 질소 머스터드, 와파린, 보툴리눔 독소, 콜타르, 미녹시딜, 피나스테리드, 실데나필 등 생명뿐 아니라 ‘삶의 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약물도 다양하게 포함됐다.
개발 과정의 우여곡절은 다양하다. 아스피린처럼 오랜 세월 쌓인 결과물도 있지만 페니실린이나 질소 머스터드처럼 우연한 기회에 그 ‘가능성’이 포착돼 본격 개발된 경우도 있다.
하나의 약물이 꼭 하나의 질병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박테리아가 만든 신경독 보툴리눔 독소는 피부 미용과 편두통, 알레르기 비염과 함께 요실금에까지 사용될 수 있다. 특정 질병을 위해 개발·허가된 약물이 예상치 못하게 다른 질병에 치료 효과가 있는 경우라면 ‘오프라벨’ 처방이 되기도 한다. 다만 다양한 효과가 있다고 ‘만병통치약’으로 맹신하는 것은 금물이다. 러시아의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는 당시 ‘만병통치약’이라는 찬사를 받은 아스피린을 복용했다가 혈우병이 악화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