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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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中기업 ‘美 IRA 우회’ 투자 급증한 韓, 리스크에도 대비해야

중국 배터리 소재·광물 기업들이 최근 한국 투자를 급격히 늘리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중국 기업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자 지난 4개월간 한국에 배터리 관련 공장 5개를 짓기로 하고 40억달러(약 5조1000억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산 배터리를 일정 비율 이상 장착한 전기차에는 세액공제(보조금) 혜택을 주지 않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조항을 피하기 위해서다.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한국을 생산 거점으로 활용하려는 우회 전략이다.

미 정부가 지난해 8월 전기차 공급망을 재편하기 위해 발표한 IRA의 골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조달한 원료를 사용해야만 보조금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생산한 배터리를 전기차에 장착하면 한·미 FTA에 따라 유럽과 미국 시장에 수출할 때 중국 업체가 세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중국 기업 입장에서는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이다. 또 다른 이점도 있다. 한국에서 생산된 배터리 소재가 미국 제너럴모터스(GM), 테슬라 등에 제공되고, 이 과정에서 중국 기업이 만든 전구체 등을 한국산으로 인정받기 유리해진다. 세계 배터리 시장과 배터리 원료 공급망 석권을 이어 갈 수 있다는 얘기다. 앞다퉈 한국 기업과 합종연횡에 나서는 이유다.

문제는 중국 기업들의 한국 투자가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의 디리스킹(위험 제거) 계획을 무력화하는 상황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점이다. 블룸버그도 한·중 배터리 합작에 대해 “(글로벌) 전기차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바이든 행정부 계획을 무너뜨릴 수 있다”며 우려했다. 당장은 나쁘지 않으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에 이익이 될지도 미지수다. 중국 업체들의 투자를 마냥 반기기가 그렇다.

이러한 한·중 경협은 여러 정책적 리스크를 유발할 수 있다. 미국이 IRA 세액공제 수혜 대상에서 한·중 합작기업을 언제든 차단할 수도 있다. 양국 기업의 합작을 비판하면서 대중 공세 동참 요구나 통상 압력을 가할 개연성도 충분하다. 더구나 지금은 미국의 대중 견제와 중국의 보복 조치가 업그레이드되는 상황이 아닌가. 정부와 산업계가 미국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면서 우리 기업과 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 없는지 따져 보는 등 리스크 관리에 나설 때다. 반도체법이나 IRA 제정 때처럼 또 뒤통수를 맞고 전전긍긍하던 상황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