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기온이 35도를 웃도는 가마솥더위에 연일 온열질환자가 속출하자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대회를 조기 종료라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 있는 가운데 참가국 158개국 중 가장 많은 청소년을 파견한 국가인 영국이 행사장서의 철수를 통보해 파행 국면을 맞았다. 영국은 잼버리 참가국들 중 가장 많은 4500여 명을 파견했다.
영국 대표단의 조기 철수 방침으로 향후 다른 국가들이 줄줄이 이탈을 선언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될지 우려도 나오고 있다. 현지 상황과 주최 측의 부실한 준비·대응에 뒤늦게 대책을 쏟아냈지만 여전히 제대로 치러질지에 대한 우려에 크기 때문이다. 사망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는 게 급선무라는 지적이다.
5일 세계 잼버리 조직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3일 병원을 방문한 환자는 1486명이다. 개영식이 열렸던 지난 2일 992명을 합하면 이틀간 2478명이 병원을 다녀간 셈이다.
지난 3일 하루 동안 내원한 환자 중 ‘온열질환’ 증상자는 138명(9.4%)이다. ‘벌레물림’ 383명(26.1%), ‘피부발진’ 250명(17.1%) 등이다. 감염병인 코로나19 환자도 현재까지 28명이 파악됐다.
조직위에 따르면 현재까지 지도자 1명과 대원 1명 등 2명이 퇴영했다. 교육시민단체인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에 따르면 광주 지역 참가자 117명 중 3명이 더위로 힘들다며 복귀 의사를 밝혔다.
잼버리가 청소년들의 행사인 만큼 참가국이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철수나 피신을 권고하는 게 당연하다. 미국 스카우트 대표단이 영국에 이어 캠프장에서 조기 철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루 폴슨(Lou Paulsen) 미국 보이스카우트 운영위원장은 5일 연합뉴스에 “우리는 날씨 때문에 떠난다"라며 "우리는 (평택 미군기지 내) 캠프 험프리스로 돌아가는 것으로 돼 있다”라고 말했다.
‘오는 11일까지 캠프 험프리스에 머무는 것이 맞느냐’는 질문에 그는 “맞다. 우리는 가능한 대로 잼버리를 떠나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거기서 지내기로 했다”라고 답했다. 폴슨 운영위원장은 “청소년 대원들의 부모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 이런 상황을 알리기 위해 메일을 보냈다”라고 말했다.
그는 “6일로 예정된 K팝 콘서트를 포함해 잼버리 활동을 관두는 것에 대해 대원들이 아쉬워하는 건 사실”이라면서도 “(문제의) 핵심은 날씨인데, 우리가 이제까지 겪은 일과 예상되는 날씨, 캠프장의 역량을 고려했을 때 청소년들을 제대로 돌보기 위해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벨기에 대사관도 인천 소재 대형시설에 스카우트 대원들을 수용할 수 있는지 문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상 철수하겠다는 의미다.
이미 영내 활동의 경우 173개 중 무려 170개 프로그램을 일시 중단하면서 행사의 취지도 상당 부분 퇴색한 상태에서 참가 인원이 가장 많은 영국에 이어 미국마저 철수를 결정해 잼버리가 사실상 중단위기에 처했다.
앞서 외신들도 잇따라 피해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도 “한국이 장기간의 폭염과 씨름하면서 잼버리 참석자 수백명이 앓아누웠다”며 1일 400여명에 이어 2일 207명의 온열질환자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번 행사가 8.8㎢ 넓이의 간척지에서 개최됐다는 점을 짚으며 “자연 그늘이 거의 없었다”고 설명했다. 가디언은 한 자원봉사자가 인터뷰에서 “그늘에 있어도 엄청나게 덥다”며 “바람도 거의 불지 않는다”고 호소했다고도 전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버지니아주 출신 학부모 크리스틴 세이어스는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텐트가 준비되지 않아 아들이 바닥에서 자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세이어스는 “스카우트의 모토는 ‘준비하라’(Be Prepared)인데 주최 측은 어떻게이 정도로 준비가 안 돼 있나”라며 “아들의 꿈이 악몽처럼 보여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청소년 안전을 고려해 잼버리를 조기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부터 청소년계, 의학계, 시민사회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원내대표는 전날 오전 국회 본청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6년의 준비, 막대한 예산 투입, 그리고 국가의 체면 등 고민스러운 부분이 있겠지만 청소년들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아 행사 기간을 축소할 것인지, 나아가 중단할 것인지도 비상하게 검토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은 "갯벌을 매립해 조성한 대회 장소와 날씨 조건은 청소년 건강에 분명히, 매우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세계 청소년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잼버리 대회 즉각 중단 요청'이란 제목의 공문을 주최 측에 보냈다.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은 성명을 통해 "고온 다습한 열악한 야영 조건과 최악의 폭염이 맞물려 청소년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재난 상황에 가깝다"며 "극한의 폭염 속에 대회를 강행하는 정부를 규탄함과 동시에 인권 침해 직권조사를 통해 심각한 인명사고를 사전 예방할 것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촉구한다"고 말했다.
반면 정부는 행사 축소·중단보다는 추가 지원을 통해 예정된 일정대로 진행한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안전관리와 진행을 책임지겠다는 입장이다. 조직위에 따르면 현재까지 기간 단축과 관련한 논의는 전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휴가 중에 예비비 69억원 지출안을 재가했다. 정부는 ▲그늘막 추가 설치 ▲냉장냉동차·식수·폭염대비물품 지급 ▲의료·행정 인력 및 병상 확충 ▲방제 및 청소 인력 추가 투입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조직위 공동조직위원장인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 4일 오전 브리핑에서 "이번 행사가 안전하게 잘 끝날 수 있도록 끝까지 책임 있는 자세로 안정적 운영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4일 한덕수 국무총리도 “세계 잼버리 대회 진행을 앞으로는 중앙정부가 직접 안전관리와 진행을 책임지겠다”고 밝혔다. 한 총리는 “그동안 진행 과정에서 뜨거운 날씨로 인해 온열질환이 다수 발생하고, 일부 시설이 미비해 걱정하는 분들이 많았다”며 “지금부터 대한민국 중앙정부가 전면에 나서서 마지막 한 사람의 참가자가 새만금을 떠날 때까지 안전관리와 원활한 대회 진행을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한 총리는 또 “행정안전부를 중심으로 국방부를 비롯한 모든 중앙부처와 다른 지자체들이 합심해 주무 부처인 여성가족부와 전라북도를 지원하고, 세계스카우트연맹과 적극 소통하면서 남은 일정을 잘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