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치료 스스로 중단해도 ‘속수무책’… 정신질환자 범죄 대응 한걸음도 못 갔다 [정신질환자 대응책 ‘헛바퀴’]

2019년 충격적 안인득 사건 이후
응급 대응 강화에도 사건 잇따라
정신질환 범죄 최근 급격히 증가
강제 입원 등 예방 시스템 시급

헌재 “본인 동의 없는 입원은 위헌”
위험 성향 있어도 강제입원 어려워
지자체장에 ‘행정입원’ 권한 있지만
소송 등 우려 실제 사례 많지 않아

전문가 “잠재적 범죄자 치부 안 돼
적절한 치료받을 시스템 강구해야”

서울 관악구 신림역 일대 흉기 난동 사건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인근의 ‘칼부림 테러’ 등 주요 ‘묻지마 범죄’ 피의자들이 정신질환을 앓았거나 관련 진단을 받았다는 점에서 중증 정신질환자의 치료 및 관리 체계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21년 기준 중증 정신질환자는 65만명에 이르고 있고, 3년 전인 2018년의 50만명보다 약 13% 증가한 수치다. 이렇듯 국가 관리가 필요한 중증 정신 질환자는 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치료와 관리는 턱없이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가석방 없는 무기형’과 같은 엄정 대응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이들 중증 정신질환자를 지속 관리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묻지마 범죄’ 예방 대책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분당 흉기 난동' 사건 피의자 최모 씨가 지난 5일 경기도 성남시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6일 법의학계 등에 따르면 지난 3일 서현역 일대에서 발생한 최모(22)씨의 차량 돌진 및 흉기 난동 사건은 2019년 4월 경남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방화·흉기난동 사건, 이른바 ‘안인득 사건’과 유사한 점이 많다. 서현역 사건 피의자 최씨는 2015년 정신과에서 조현성 인격 장애 진단을 받고 2020년까지 치료를 받았지만, 3년 전부터 치료를 스스로 중단했다. 안인득 역시 조현병으로 수십 차례 치료를 받다가 스스로 치료를 중단한 뒤 4년 전 잔인한 범행을 저질렀다.

안인득의 방화 및 살인 사건은 2019년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당시 5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피의자 안인득은 앞서 2010년 행인에게 흉기를 휘둘러 재판에 넘겨진 전력이 있었고, 2011년부터 정신병원에서 조현병으로 68차례 치료를 받았지만 2016년 7월을 끝으로 스스로 치료를 중단했다. 방화·살인 사건을 저지르기 전에는 이웃과 수차례 시비가 붙고 폭력을 행사해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과 보건 당국은 안인득을 추적·관리하지 못했고, 결국 끔찍한 참사로 이어졌다.

 

지난 2019년 경남 진주시에서 자신이 거주하던 아파트에 불을 지른 뒤 대피하던 이웃들에게 흉기를 마구 휘두른 안인득. 세계일보 자료사진

보건복지부 등 정부는 안인득 사건 이후 전국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인력을 충원하고 24시간 응급대응체계를 구축하는 등의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대체로 실효성이 없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후에도 중증 정신질환자에 의한 비슷한 강력범죄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지난 4일 대전 대덕구의 한 고등학교에 침입해 교사를 흉기로 찌르고 도주한 20대 남성도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입원 치료를 권유했지만 아무런 치료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서현역 사건과 대전 고교 사건 이전에도 비슷한 사고는 올해만 여러 차례 있었다. 지난 1월에는 광주에서 피해망상 증세가 있던 40대가 “어머니가 괴물로 보였다”며 둔기로 살해했고, 3월 부산에서는 조현병 약을 끊은 60대가 경찰관을 흉기로 찌른 일도 있었다.

 

◆안인득 사건 이후 변한 게 없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의 한국의 범죄현상과 형사정책(2021)에 따르면 정신질환자의 범죄 발생 추이는 2016년 8343명, 2017년 9089명으로 늘다가 2018년 7304명, 2019년 7818명으로 감소했으나 2020년 다시 9058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반사회성 등 위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정신질환자의 강제입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무부와 보건복지부가 검토 중인 사법입원제 도입이 대표적이다. 사법입원제는 범죄 예방을 위해 중증 정신질환자의 입원 여부를 법관이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우려가 큰 일부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한 입원 및 격리 제도가 적법 절차에 따라 실효성 있게 운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무 부처인 복지부와 협의해 도입 추진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신질환자에 대한 강제입원은 사실상 쉽지 않다. 2016년 본인 동의 없는 정신병원 강제입원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으로 판결하고 이후 2017년부터 시행된 ‘정신건강복지법’이 시행되면서다. 기존에는 보호자 2명과 전문의 1명의 동의가 있으면 환자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입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환자의 인권 침해 문제가 대두됐고, 가족 간 갈등에 강제입원이 악용되기도 했다. 개정된 법은 보호의무자에 의한 강제입원(보호입원)을 하기 위해서는 2명 이상의 보호의무자가 신청하고 2명 이상의 전문의의 일치된 소견이 필요하다. 또 법에는 지방자치단체장이 강제입원을 신청할 수 있는 ‘행정입원’도 있지만 소송 등의 우려로 사례가 많지 않다.

 

조현병 등 중증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치부해선 안 된다는 시각도 있다. 복지부가 올해 1월 내놓은 ‘국가 정신건강 현황 보고서 2021’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전국의 중증 정신질환자는 65만1813명으로 2018년(50만9056명)보다 8만1857명(13.6%) 늘었다. 중증 정신질환은 조현병, 분열형 및 망상 장애, 양극성 장애, 우울 장애 등이 포함된다. 이 중 조현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18만9878명으로 중증 정신질환자의 28%다. 이 중 정신의료기관에 입원한 환자는 4만8049명이었다. 복지부는 사법입원제 도입과 함께 정신질환자의 외래치료 지원 제도 전반을 개선해 치료 실효성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연이은 흉기 난동 사건 발생과 살인 예고 등으로 국민 불안감이 커지는 가운데 호신용품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6일 서울 서초구의 호신용품 판매점인 대한안전공사에서 관계자가 각종 호신용품을 보여주고 있다. 뉴시스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전문가들은 강제입원 절차를 강화하더라도 중증 정신질환자의 비(非)자의 입원과 치료를 쉽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단순히 가족들에게 짐을 지우기보다는 국가가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법제사회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는 백종우 경희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현행법에서는 정신질환자가 어떤 자해나 타해의 가능성이 있어도 병원으로 데려갈 방법이 없다”며 “현재 지금 병원으로 이송되는 고위험 정신질환자의 60%는 가족들이 데려 오고 있고, 20%가 경찰, 20%는 자의 방문”이라고 설명했다.

 

연이은 흉기 난동 사건 발생과 살인 예고 등으로 국민 불안감이 커지는 가운데 6일 서울 강남구 강남역에서 중무장한 경찰특공대원들이 장갑차 옆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연합뉴스

백 교수에 따르면 영국과 호주는 신체적 구속을 할 수 있는 비(非)자의 입원이나 비자의 치료에 대한 결정을 복지부 산하의 정신건강심판원이라는 준사법행정기관, 즉 국가 기관이 한다. 대만의 경우도 자·타해 우려가 있는 정신질환자를 발견해 국민이 신고하면 경찰이 근처의 의료 기관에 호송해 치료를 받게 해야만 한다.

 

일본의 경우도 정신과 전문의에게 공무원의 권한을 부여해 직접 집을 방문해 진단하고, 경찰·소방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입원할 수 있다. 백 교수는 “산업화, 핵가족화가 되면서 거기에 걸맞은 정신의료 시스템이나 국가 관리 시스템이 필요한데 그게 부재하다 보니까 이런 안타까운 사고만 증가할 뿐 아니라 편견이 증가하는 악순환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과 LG의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는 대구 야구장에서 '흉기 난동'을 부리겠다는 예고 글이 올라온 지난 5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경찰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해국 가톨릭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단순히 입원이나 치료 같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시스템만 갖출 게 아니라 경찰과 초기에 정신질환자들을 평가할 수 있는 정신건강 전문 요원 등이 같이 움직여 줘야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정신질환자들이 스스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 제도를 강화하고 사회의 인식 개선을 이끌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중증 정신질환자가 정신과 치료를 받을 때 더 큰 비중을 국가에서 지원하거나 치료를 받았을 때 혜택을 주는 것과 같은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우·송민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