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홈쇼핑과 시각기술 솔루션 기업 포바이포가 제작한 루시는 최근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상인간 중 하나다. 롯데홈쇼핑 라이브커머스 정식 쇼호스트로 판매방송을 하고, 최근에는 태국으로 진출해 모델과 인플루언서로 활동하기로 했다.
표정이 다소 딱딱해 보일 때도 있지만, 라방에서 실시간 고객과 소통하고 까다롭다고 알려진 야외 콘텐츠 영상도 매끄럽다. 지금은 대역 모델에 합성하는 단계지만 포바이포와 롯데홈쇼핑은 대역 없이 몸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도록 고도화를 진행 중이다. 최종 목표는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스스로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가상인간 제작이다.
가상인간과 AI는 더는 새롭거나 특이한 존재가 아니다. 특히 영상·광고 콘텐츠 영역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시각적 어색함이 옅어지고 똑똑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할리우드 배우와 작가들은 AI가 초상권·일자리를 위협한다며 3개월 가까이 파업을 벌이고 있다. 국내에선 가상인간·AI가 어느 수준까지 활용되고 있을까. 할리우드의 걱정처럼 배우와 작가를 대체할 수 있을까.
◆가상인간, 광고모델·가수 등 다방면 활동
11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가상인간들은 광고모델, 인플루언서, 쇼호스트, 가수 등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국내 첫 가상인간인 ‘로지’는 광고에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로지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15만5000명에 이른다. 올해는 2030부산세계박람회 홍보대사, 태국관광청 홍보대사 등을 맡고 있다.
또 다른 가상인간 ‘한유아’는 가수다. 1990년 발표된 강수지의 노래 '보랏빛 향기'를 리메이크해 지난 3월 세 번째 싱글 음원을 발표했다. 가상인간 가수는 또 있다. 넷마블과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함께 제작한 가상 걸그룹 메이브는 지난 1월 지상파 음악프로그램에 출연해 데뷔 무대를 선보였다. 펄스나인이 지난해 선보인 가상 걸그룹 이터니티의 멤버 제인은 지난해 한 웹드라마에서 대사가 있는 정식 배역을 맡아 연기하기도 했다.
AI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을 우리 곁에 데려오기도 한다. 국방부는 지난달 고 박인철 소령을 가상인간으로 복원했다. 공군 제20전투비행단 소속의 KF-16 전투기 조종사였던 고 박 소령은 2007년 7월 서해 상공에서 야간 비행 중 순직했다. 지난 1월 tvN ‘회장님네 사람들’에서는 2020년 세상을 떠난 고 박윤배씨가 가상인간으로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해외에서는 제임스 딘이 주연인 영화 ‘백 투 에덴’(Back to Eden)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1955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제임스 딘을 AI로 구현한 것이다.
‘30초의 미학’이라는 광고를 AI가 만들기도 한다. 챗GPT가 내놓은 콘티로 수정 없이 광고 제작했다. 챗GPT에게 ‘아임닭 광고 콘티 재밌게 짜줘. 재밌게. 마케팅 타깃은 자취생, 아이 엄마, 직장인이야’라고 입력한 결과물이다. 자취생이 뭘 해먹을지 고민하고, 아이 엄마가 등장해 닭가슴살이 필요하다고 하면 직장인이 문을 열고 들어와 아임닭을 소개하는 구성이다.
삼성생명은 여러 이미지로 구성한 광고를 선보였는데, 이미지 생성AI 미드저니로 이미지를 만들었고, 배경음악은 스타트업 포자랩스의 음원 창작 AI로 제작했다.
◆섬세 감정·시대정신 표현은 아직
가상인간과 AI의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사람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창작 영역도 성역이 아니게 됐다. 다만 배우나 작가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섬세한 감정 표현이나 시대 정신을 담은 스토리 창작은 어렵다는 것이다. 만화가 있지만 웹툰이라는 장르가 새로 생겼듯, 기존 미디어에 더해 AI 영화 등 새로운 장르가 생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포바이포 관계자는 “얼굴과 움직임 등 ‘겉모습’을 구현하는 기술 수준만 놓고 보면 실제 사람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가 됐다는 데는 업계에서도 공감한다”며 “다만 즉흥 연기나 상대배우와의 교감 등 인간 배우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은 단기간에 가상인간이 대체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광고업계 관계자도 “AI를 이용한다고 하지만 광고주가 원하는 의도한 텍스트나 이미지, 음악, 영상이 나오려면 결국 사람이 수십, 수백번 명령어를 입력해야 한다”며 “사회·문화적 정서를 반영한 광고 문구 작성은 아직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광고모델로도 아직은 가상인간보다는 유명인이 더 선호된다”고 덧붙였다.
가상인간·AI가 일상화하는 시대에 필요한 법·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망자의 노래가 얼굴을 기술로 되살릴 수 있는 권리는 누가 가질 것인지, 가짜를 진짜로 속이는 문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등 여러 쟁점이 나올 수 있다. 이경전 경희대 경영학·빅데이터응용학과 교수는 “예술가나 가수, 연예인들이 목소리나 외모 등에 대한 권리를 사후 어떻게 할 것인지 미리 명확하게 정해놓는 시대가 될 것”이라며 “위조화폐를 강하게 단죄하듯 가상인간·AI로 진짜인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하지 않도록 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AI에 일자리 빼앗길까… ‘엇갈린 전망’
문화계가 아닌 영역에서도 인공지능(AI)이 일자리를 빼앗을 것인지에 대해 불안감이 있다. 각 기관이 연구·분석을 내놓고 있지만 전망은 엇갈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달 내놓은 ‘2023년 고용 전망’은 38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일자리 27%가 AI 혁명으로 사라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쉽게 자동화할 수 있는 기술에 의존하고 있는 직종을 위험군으로 꼽았다.
OECD 7개국 제조업과 금융업 근로자 5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금융 22%·제조 19%가 향후 10년 내 일자리 감소를 극도로 또는 매우 걱정한다고 응답했다.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금융 34%·제조 38%)는 응답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AI 기술 혁신이 장기적으로는 고용 증가에 기여할 것으로 봤다. 당장은 AI 기술 혁신으로 약 3억개 정규직이 자동화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업과 산업이 자동화에 부분적으로만 노출돼 있기에 AI에 대체되기보다는 보완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분석했다. 또 역사적으로도 오늘날 근로자의 60%가 1940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군에 종사하고 있고, 80년간 고용 증가의 85% 이상이 기술 진보에 따른 것이라는 점도 근거로 제시했다.
지난 5월 공개된 세계경제포럼(WEF)의 ‘일자리의 미래’ 보고서는 다소 부정적이다. 전 세계 27개 산업클러스터와 45개국 기업 803곳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AI와 기술혁신 등으로 올해부터 2027년까지 6900만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고, 8300만개의 일자리는 사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수치만 보면 사라지는 일자리가 더 많은 것이다.
계산원, 매표원, 데이터 입력 및 회계와 같은 기록 보관 및 관리 직책에서 최대 26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예측했다. 반면 자율주행차·전기자동차 전문가와 AI·머신러닝 전문가, 핀테크 엔지니어 등은 향후 5년 동안 수요가 높을 것으로 내다봤다. 교육과 농업, 디지털 상거래·무역, 디지털 마케팅 분야 등에서도 추가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챗GPT를 만든 오픈AI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의 공동 연구에서는 AI 확산에 취약한 직업으로 회계사, 수학자, 통역사, 작가, 웹 디자이너 등을 꼽았다. 식당 설거지 담당자와 오토바이 수리공, 즉석요리 조리사, 석유·가스 잡역부 등은 AI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