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의사가 되는데 지금 있는 약 말고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하면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고, 그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난달 27일 충남 천안시 순천향대 부속 천안병원 향설의학관의 한 실험실에서 만난 순천향대 의학과 1학년 조유진(21)씨는 의사과학자 양성 교육과정에 참여한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조씨는 여름방학 동안 매일 오전 9시30분 해부학교실 실험실로 출근해 소아 때 열성경련이 자폐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자폐의 원인이 되는 특정물질을 발굴한다면 조기진단이 가능해진다. 빠른 발견으로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는 데다 자폐증이 발병하기 전에 예방할 수 있는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도 도움이 돼 자폐 치료의 새로운 길을 제시할 근거가 될 수 있다.
21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의사(M.D)이면서 이공계 박사(Ph.D)이기도 한 ‘의사과학자’는 기존 의학의 한계를 넘어 혁신적인 치료법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재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예과(2년)와 본과(4년)를 합쳐 6년의 의대 교육과정에서 학생들이 기초의학 연구에 참여할 기회는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국내 의대 교육과정이 임상의사를 육성하는 데 집중된 탓이다.
의사과학자의 미래가 불확실해서 학교와 학생 모두 임상의사라는 하나의 목표에만 몰두한 셈인데, 교육체계를 다변화하고 의사과학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핵심인재가 의대로 몰리는 가운데 이들의 앞길이 임상의사만으로 제한되는 현실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올해 85명의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이 이들처럼 여름·겨울방학 때 교육과정에서 접하기 어려운 의과학분야 연구를 한 달간 경험한다. 의과학분야 교육과정은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이 학부 때부터 기초의학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지원해 의사과학자 양성체계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2021년부터 시작했다.
조씨는 “지금부터 이런 경험을 해야 진료 현장에서도 연구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의과학자 양성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참여 이유를 설명했다. 연구진은 자폐스펙트럼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해마 내 특정물질을 분석하기 위해 세포에 색을 입혀 현미경으로 확인하고, 열성경련을 겪은 쥐와 겪지 않은 쥐의 행동을 비교하는 행동분석을 반복하는 과정을 거친다. 기초적인 실험방법과 연구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대생들의 관심도 높다.
조씨와 같은 교육과정에 참여 중인 순천향대 의과대학 예과 2학년 이한나(20)씨는 “적성에 맞는지 알려면 여러 경험을 해보는 게 좋을 거 같았다”며 “유일한 실습과목에서 실험했을 때 결과가 잘 안 풀렸던 적이 있어서 실험을 마저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올해로 3년째인 의대생 대상 의과학 연구 지원사업에 지원한 학생들은 지난해 159명에서 올해 276명으로 74%가량 증가했다. 순천향대의 경우 의과학 연구 교육과정에 참여한 학생이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성과도 있었다. 김덕수 순천향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는 “의대에서 강의하면 원래 과학자가 되고 싶어한 학생들이 의외로 많고 자질 있는 학생들도 많다”고 귀띔했다.
◆의사과학자, 의사의 ‘1%’ 수준
한국의 의료서비스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그만큼 임상의의 질적 수준이 높다. 하지만 의학을 비롯한 과학 분야는 해외 선진국들과 차이가 큰 것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이 1950년대부터 의사과학자 양성체계를 만들기 시작한 데 반해 우리는 그 역사가 10년 정도로 짧고 이에 대한 정부 지원도 2019년부터 확대돼서다. 의사과학자를 배출하더라도 이들이 연구자로 안착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체계가 부족해 임상의사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신찬수 한국의대·의전원협회 이사장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의사과학자는 지난해 활동의사 수(약 11만명)의 1%가 조금 넘는 15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의과대학 40곳의 기초의학교실 교수 1200여명과 연구소, 제약회사, 바이오벤처 기업 등에 있는 의사과학자를 합친 수다. 국내에서 한 해 새로 유입되는 의사과학자도 수십명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경우 전체 의대생의 4%(약 1700명) 정도가 매년 의사과학자를 지원하고 있다.
기초연구(연구실)에서 얻은 결과를 임상현장(병원)에 적용하는 의사과학자는 양쪽의 언어를 이해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의사과학자인 김한상 연세대 의대 교수(종양내과)는 “기초의학에서 아직 활용 안 된 부분을 암치료에 적용하기도 하고 임상현장에서 환자의 특이한 현상을 연구실에서 기전을 분석하는 등의 연구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의학을 전공한 의사들이 질병을 치료하고 이해하는 데 유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국이 코로나19 유행 초반 방역 대응에서 선전하다가 이후 백신 개발국들에 의지하게 된 것은 의과학 역량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화이자와 함께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했던 독일의 바이오엔테크 공동창업자인 우구르 사힌과 외즐렘 튀레지 부부, 모더나와 화이자에서 백신 개발을 맡았던 주요 인력도 의사과학자다.
◆“의사과학자 ‘배출’ 후 ‘유지’위한 지원 필요”
기초의학에 대한 의대생들의 관심은 꽤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의사과학자의 불확실한 미래 등으로 의대 교육과정이 임상의사를 양성하는 데 집중된 게 현실이다. 김 교수는 “의사과학자 미래에 대한 정보가 적은 데다 의사라는 보장된 삶을 버리기엔 학생들이 느끼는 불확실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조씨도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는 제약회사에서 신약을 만들어볼 수도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지만 다들 가는 길이 비슷하고 다른 길로 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고 말했다.
의사과학자가 되고도 연구자로 남는 비율이 소수에 불과한 만큼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의사과학자가 연구에 집중하려면 진료시간을 줄여야 하는데, 이는 병원의 진료수익 감소로 이어진다. 병원이 연구에 투자하기보다는 의사의 진료를 원하게 되고 의사들은 연구를 뒤로하고 환자 진료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의사과학자 지원 방안은 대체로 양성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에 집중된 편이다. 미국 등과 비교해 의사과학자가 연구자로 안착하기 위한 지원은 부족하다는 평가다. 김덕수 교수는 “우리나라 병원은 진료수익에 방점이 찍혀 있다”며 “진료수익을 메울 정도로 연구비가 늘어나지 않으면 병원이 연구에 투자하긴 쉽지 않다”고 했다. 김한상 교수는 “기초·임상뿐만 아니라 우수 인재들이 특정한 곳에 몰리는 현상이 바람직하진 않다”며 “과목 쏠림 현상 등 앞으로 10년 새 교육과정과 이후 활동분야까지 전반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