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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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팬데믹, 기후위기, 인류 위기의 시대… 세상 모든 어머니에 위로를 건네다

31일 국립합창단 세계 초연 ‘미사 솔렘니스’ 작곡가 류재준

미사곡 형태 교향곡… “믿음·구원 담아”
‘블랙리스트’ 파문·암 투병 절망 딛고
6년 만에 완성… 연주시간 80분 달해

펜데레츠키 사사… 유럽서 먼저 명성
15회째 이끌고 있는 서울국제음악제
페트렌코 등 지휘… 2023년 10월 무대에

"이 작품을 짓게 된 원동력은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는 어머니들의 슬픔, 이상 고온과 재해에 시달리는 암담한 세상에 자식을 남겨두는 어머니들의 아픔이에요.”

국립합창단의 ‘2023 여름합창축제’ 작품으로 오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세계 초연되는 ‘미사 솔렘니스(Missa Solemnis·장엄미사)’의 작곡가인 류재준(53)은 이 작품을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위한 헌정곡”이라고 소개했다.

 

지난 25일 예술의전당 N스튜디오의 국립합창단 연습실에서 만난 류재준은 “극한의 사회 대립과 ‘신냉전 시대’로의 돌입,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 정체된 세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기후위기 등은 과연 인류가 이런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짙은 의구심을 남겼다”며 이렇게 말했다.

미사 솔렘니스에 대해 그는 “(기독교 종교의식에 쓰이는) 미사(예배)곡의 형태만 빌린 것으로, 미사곡에서 중요한 가사들을 뽑아 자기 성찰을 하도록 하는 작품일 뿐 미사곡이 아니다”며 “실제 미사에서 사용되지도 않는 등 종교적인 것과 조금 거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두 작품을 남긴) 모차르트를 제외하고는 베토벤, 브루크너처럼 작곡가가 평생 한 번 쓰거나 도전해보는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작곡가 류재준은 암과 싸우며 6년에 걸쳐 완성한 자신의 3번 교향곡 ‘미사 솔렘니스’에 대해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위한 헌정곡”이라고 소개했다. 국립합창단 제공

위대한 음악가의 삶을 다룬 이야기로 19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의 장편소설 ‘장크리스토프’를 고3 때 감명 깊게 읽고 뒤늦게 음악을 시작한 류재준은 한국보다 클래식 음악 본고장 유럽에서 명성이 더 높다.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폴란드 크라쿠프 음악원에서 펜데레츠키(1933∼2020)를 사사한 그는 2004년 ‘타악기를 위한 파사칼리아’에 이어 2006년 발표한 바이올린 협주곡 1번으로 유럽 음악계의 호평을 받았다. 2008년에는 첫 번째 교향곡으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 등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한 전 세대들에게 헌정하는 ‘진혼교향곡(Sinfonia da Requiem)’을 선보이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후 독일·영국·프랑스·핀란드·폴란드 등 유럽 클래식계가 앞다퉈 그의 작품을 연주하고, 폴란드 정부는 1급 훈장까지 줬다. 그런데 2017년 위기가 닥쳤다. 자신이 이끄는 ‘서울국제음악제’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 대상에서 탈락하고, 암(림프종)에 걸려 건강마저 악화한 것이다. “여러 가지로 힘들고 작곡도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뭘 남길까’ 고민을 많이 할 때 미사 솔렘니스가 떠올랐죠. 믿음과 용서, 구원을 얘기하는 가사 자체가 너무 훌륭하잖아요. 어머니들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식들을 걱정하며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게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전쟁, 기아·환경문제, 코로나19 팬데믹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 6년에 걸쳐 세 번째 교향곡인 미사 솔렘니스를 완성했다.

그동안 힘겹게 암과 싸우며 건강을 회복한 그는 “이번 교향곡(연주 시간 80분)이 가장 규모가 크다”며 “앞으로 5번 교향곡까지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머릿속에 이미 다 들어 있다”고 했다.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는 곡과 아파트 관련 가곡집 등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도 주목받았던 류재준은 “그저 제가 경험하고 느낀 것을 일기 쓰듯 음악으로 기록하는 것일 뿐인데, 다른 사람들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표현이나 비판으로) 끌어올리는 것 같다”며 “어떤 음악이든 즐거움과 위로 등 듣는 사람에게 행복과 기쁨을 줘야 한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류재준이 2010년 창단한 앙상블 오푸스를 중심으로 오케스트라를 꾸려 시작한 서울국제음악제(SIMF)는 올해 15회째를 맞았다. SIMF는 2000년대 초반 “한 나라 수도를 대표할 수 있는 음악제는 그 나라 음악문화의 거울”이라며 “서울에는 어떤 음악제가 있냐”는 스승 펜데레츠키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아 만들었다. 그가 작곡 수입 등 사재를 쏟아부어서라도 훌륭한 음악제를 만들려고 고군분투하는 이유다. 올해(10월) SIMF에선 브람스 작품을 조명하는데 세계적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 등 국내외 정상급 음악가들이 참여한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