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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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월의쉼표] 돈도 명예도 없지만

오랜만에 후배를 만났다. 그는 수년째 한 회사에 재직 중인 직장인이지만 동시에 등단 이후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해온 소설가이기도 한데, 지나가듯 최근에 승진했다는 이야기를 하기에 축하해주었더니 돌연 한숨을 쉬었다. 선배, 축하는 감사하지만 사실 제 꿈은 승진 같은 거 안 해도 되고 연봉 협상도 필요 없는 전업 작가예요. 씁쓸한 낯으로 웃으며 그는 말했다. 돈 벌기는 쉬운데 소설 쓰기는 참 어려워요. 근데 돈도 안 되고 명예도 안 되지요. 그런데도 쓰는 이유는 뭘까요? 선배는 왜 써요?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몇 해 전의 일이 떠올랐다. 아이가 두 돌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두 해를 꼬박 손도 못 댔던 소설을 다시 쓰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 아이를 보낼 어린이집을 알아보았다. 요행히 마땅한 곳이 있어 맞벌이 부부 전형 종일반 원서를 접수했다. 문제는 주민 센터에서 맞벌이 증빙 서류가 반려되었다는 연락이 온 것이었다. 담당 공무원은 출퇴근을 해야 직업이므로 소설가는 직업이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의 시시비비를 가리기에 앞서 나는 마음이 급했다. 종일반에 보내지 못하면 소설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없으니까. 하여 사정했다. 출퇴근을 하지는 않지만 장소 이동이 없을 뿐 소설가도 마감 기한이 있고 그때까지 원고를 완성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꼭 필요한 시간이 있는 것은 출퇴근 직장인과 다를 바 없다고.

상부에 보고하겠다던 담당자가 이튿날 전화로 요청한 것은 원고청탁서와 출간계약서, 그리고 집필 중인 원고의 앞부분이었다. 원고의 앞부분이라니. 집필은커녕 구상도 안 했는데. 그러나 그는 상사의 지시라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나는 이미 부족한 잠을 더 줄이고 또 줄여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어쨌든 내가 소설을 제출하면 누군가 읽겠다는 것 아닌가. 그는 어떤 소설을 좋아할까. 스릴러? 로맨스? 앞부분만 읽어도 흥미를 느끼게 하려면 사건을 앞쪽에 배치해야겠지? 나는 미지의 공무원 독자의 독서 취향을 멋대로 짐작해가며 고군분투했다. 놀랍게도 소설이 술술 잘 쓰였다. 물론 완성을 염두에 두기보다 당장 며칠 내로 제출 가능한 일정 분량만 쓰는 상황이라 그랬겠지만 그때만큼 순수하게 창작의 희열에 들떴던 때가 또 있던가. 그러니까 요는 좋아서 쓴다는 것. 돈도 안 되고 명예도 안 되지만 누군가 읽어주기만 한다면 신나서 쓸 수 있다는 것. 그것 아닐까.


김미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