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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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는 선생님 하지 마세요”…‘공교육 멈춤의 날’ 일렁이는 추모 물결 [사사건건]

“선생님 하늘나라 가서 푹 쉬고 행복하세요. 저는 선생님 말 잘 들을게요. 1학년 학생 올림.”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사망 교사의 49재인 4일 학교에 마련된 추모공간에는 국화꽃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학교 측은 이날 오전 9시 추모공간을 열었지만 더 이른 시간부터 방문한 시민과 교사들이 묵념 끝에 울음을 터뜨렸다.

서울 양천구 A초등학교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 한 동료 교사는 ‘그곳에서는 선생님 하지 마세요’라는 쪽지를 적어 붙였다. 윤준호 기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숨진 교사 49재 끝없는 추모 행렬

 

이날 오전 11시쯤 추모공간 벽면은 초등학생들이 삐뚤빼뚤 남긴 글씨부터 변화를 다짐하는 동료 교사들의 편지까지 수백장의 쪽지로 빼곡했다. 분홍색 머리띠를 하고 추모 공간을 서성이던 한 학생은 고인을 기리는 마음들이 날아갈 새라 쪽지들의 접착면을 차례로 꾹꾹 누르고서야 자리를 떠났다.

 

‘공교육 멈춤의 날’로 명명된 이날 전국 각지에서는 상당수 교사가 연가·병가를 내고 지난 7월 숨진 서이초 교사를 애도했다. 전국 시도 교육청 등에 따르면 추모집회 참석을 위해 결근한 교사가 많은 일부 초등학교의 경우 단축수업이나 합반수업이 이뤄지기도 했다. 추모 현장을 찾은 학부모와 학생들은 이러한 교사들의 움직임에 현장체험학습을 신청하는 식으로 동참하며 지지를 표했다.

서울 서초구 서이초 교정에 마련된 추모공간에는 고인을 기리는 쪽지들이 벽면을 수놓았다. 김나현 기자
초등학생들이 고사리 손으로 적은 쪽지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김나현 기자

경기남부에서 초등학교 3학년 아들과 함께 서이초를 찾은 김모(39)씨는 “아들과 선생님의 소중함을 함께 느끼기 위해 현장체험학습을 신청하고 일찍부터 왔다”며 “학부모 입장에선 재량휴업일로 미리 안내됐으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는데, 교육부의 대처가 학부모들을 더 우왕좌왕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에서 온 학부모도 “아들 학교에서 별다른 공지가 없었지만, 오늘은 추모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아이 현장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왔다”고 했다.

 

오후 3시부터는 고인을 기리는 추모식이 서이초 강당에서 열렸다. 유족, 교직원, 교육청 관계자 등 150명이 참석해 고인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며 편지를 낭독했다. 한 동료 교사는 “친구 하나 만들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 너를 동기로 만나서 감사하고 행복하다”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그곳에서만큼은 행복하길 기도한다”고 눈물을 쏟아내 참석자들을 숙연케 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방문했다. 이 부총리는 “그동안 무너진 교권에 대한 선생님들 목소리를 외면해온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되돌아본다”며 “현장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교육 전반을 면밀하게 살펴보겠다”고 약속했다. 이 부총리의 추모사 낭독 중 추모객 사이에선 반발도 있었다. 몇몇 추모객은 부총리의 추모사가 끝날 때까지 의자를 돌려 강단을 등지기도 했다.

서울 양천구 A초등학교 앞 도로는 동료 교사들이 보낸 근조화환으로 빼곡했다. 윤준호 기자

◆잇따른 교사 사망 소식에 깊어지는 슬픔

 

또 한 명의 교사가 세상을 등진 서울 양천구 A초등학교 정문 앞에도 오전부터 추모 발길이 이어졌다. 정문 앞 300여m 남짓한 길 양옆으로 근조 화환이 겹겹이 놓였지만, 화환을 실은 트럭 행렬은 그칠 줄 몰랐다. 가족과 함께 왔다는 시민 정모(47)씨는 “돌아가신 선생님과 함께 근무한 적 있어 아내가 특히 남 일처럼 느끼지 못하고 힘들어한다”며 “사람들이 화를 표출할 데가 없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교사들에게 쏟아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울분을 토해냈다.

 

A초등학교 교정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는 동료 교사와 학생, 학부모와 주민들이 붙인 쪽지들이 가득했다. 서울 동료 교사라고 밝힌 한 추모객은 쪽지에 ‘그곳에서는 선생님 하지 마세요’라고 적었다. A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학생은 ‘○반 친구들이 선생님 좋아하고 기다렸어요. 저도 기다렸는데 돌아가셨다고 해서 너무 슬펐어요. 계속 눈물이 날 것 같아요’라고 쪽지에 썼다.

 

추모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 가운덴 슬픔에 빠진 이들이 많았다. 아들과 함께 왔다는 여모(43)씨는 “동네 주민이자 초등학교 교사인데 근무상 이유로 오늘 휴무를 내고 조문을 왔다”며 눈물을 훔쳤다. 여씨는 “지금 교사들은 모두 위축돼 있다”며 “생활지도를 포기하면 편할 수 있지만 선생이 될 때 품었던 각자의 신념이 있어 교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가장 시급한 건 아동복지법을 원래 취지대로 가정에만 적용하고 학교에선 적용해 교사들이 위축받지 않고 교육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 도로가 주최 측 추산 5만여명의 교사와 시민들로 가득 찼다. 김나현 기자

◆‘공교육 멈춤의 날’ 거리로 나선 12만 교사들과 동료 시민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5만여명 넘는 교사들이 모여 고인을 추모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지난 7월 서이초 교사에 이어 최근 나흘간 경기·전북에서 교사 3명이 극단적 선택을 한 사실이 알려지고 추모 분위기가 짙어지며 전국 각지에서 교사들이 국회 앞으로 집결했다.

국회 앞 추모 집회 현장에서 심이진(9)양이 직접 쓴 응원 문구가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있다. 김나현 기자

이날 충남 천안시에서 KTX를 타고 홀로 서울에 왔다는 초등교사 김모(34)씨는 “현재 아동학대 신고에 대해 교사를 보호해 줄 제도가 없는데, 교육부가 내놓은 대책은 모호하고 실효성이 없다”며 “오늘만큼은 구체적인 법 개정을 보여달라고 함께 목소리 내기 위해 현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경기 의정부시에서 초등학교 3학년생 딸과 함께 집회 현장을 찾은 심양선(40)씨는 “공교육 멈춤의 날을 맞이해 선생님들이 무너진 교권을 위해 힘쓰고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며 “함께 헌화도 해보며 선생님들을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옆에서 ‘선생님♡사랑합니다 힘내세요!’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있던 심이진(9)양은 “선생님들을 응원하기 위해 직접 쓴 것”이라며 “선생님들이 행복해야 저도 행복해요”라고 응원의 뜻을 전했다. 

‘흰색 꽃만 받을 것 같아 선생님처럼 예쁜 색의 카네이션을 준비했어요’라고 적힌 쪽지와 꽃이 서이초 추모 공간에 놓여 있다. 김나현 기자

이날 추모집회는 '한마음으로 함께하는 모두'라는 이름의 교사 모임이 주최했다. 오후 4시30분쯤 이들은 "어떠한 단체와도 연관돼 있지 않고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이곳에 모였다"며 본격적으로 집회 시작을 알렸다. 주최 측은 ▲교사 사망 진상규명, ▲교원보호 합의안 의결, ▲안전하고 존중받는 교육환경 조성을 중점적으로 촉구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수많은 교사가 민원과 고소의 위협으로 무너져 갈 때 교육부는 어디에 있었느냐”며 ‘교육부는 징계 협박을 당장 철회하고 본분에 맞게 교사들을 보호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다시는 어떤 교사도 홀로 죽음을 택하지 않도록 우리가 지키고 바꾸겠다’며 ‘대한민국 교사의 이름으로 오늘을 공교육 정상화 시작의 날로 선포한다’고 밝혔다.

 

이날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도 고인을 기리는 새하얀 국화꽃 물결이 일렁였다. 주최 측에 따르면 서울을 제외한 지역에서도 7만여명(경찰 추산 1만4000여명)이 모여 추모에 동참했다고 밝혔다. 울산시 한 초등학교 교사 박모(25)씨는 “교육부의 징계 발표 이후 부장 선생님은 소신껏 행동하되 교사 본인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주의하라 당부하고 있다”며 “그러나 진상규명과 교권보호 합의안 의결 등 뚜렷한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 집회에 함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국 곳곳에서 집회의 열기가 고조되는 와중에 국회 앞 집회 현장에선 숨진 서이초 교사의 어머니가 쓴 편지가 대독됐다. 편지에 따르면 유족은 “네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들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찾는 데 노력하겠다”며 “그것만이 전국의 선생님들이 너에게 보내준 추모 화환에 보답하는 길이고 교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희망의 불씨이자 작은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뜨거운 아스팔트의 열기 속에도 교사들은 연달아 구호를 외치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김나현·윤준호·이민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