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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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순과 오만… 삶을 바라보는 두 시선 [엄형준의 씬세계]

칸·베를린 수상 유럽 영화 2선

佛 젊은 거장 한센 뢰베의 ‘어느 멋진 아침’
기억·시력 잃는 父 돌보는 싱글맘의 사랑
육체와 정신의 의미, 삶은 무엇인가 성찰

獨 최고 감독 페촐트의 ‘어파이어’
자신만의 세계 갇힌 자기중심적 소설가
화재라는 재난 앞에 비로소 주변 돌아봐

최근 개봉을 앞둔 영화 중에선 유독 유럽 작품이 눈에 띈다. 40대의 젊은 거장으로 불리는 미아 한센 뢰베 감독의 ‘어느 멋진 아침’과 독일 최고의 감독으로 불리는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어파이어’는 잔잔하지만 우리의 깊은 내면을 들춰내는 작품이다.

6일 개봉하는 ‘어느 멋진 아침’은 우리나라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프랑스 대표 여배우로, 칸 영화제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바 있는 레아 세이두가 주연인 ‘산드라’ 역을 맡았다.

영화 ‘어느 멋진 아침’에선 레아 세이두(왼쪽)가, ‘어파이어’에선 파울라 베어가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다. 유럽 거장의 두 영화는 평범한 일상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

남편이 죽고 여덟살 난 딸을 키우는 산드라는 희소병에 걸려 시각을 잃고 기억마저 잃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슴 아파한다. 그러던 중 남편의 친구이기도 했던 오랜 친구 클레망(멜빌 푸포)을 만나고, 둘 사이엔 전에 없던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한센 뢰베 감독은 영화를 통해 살아간다는 의미, 기쁨과 슬픔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육체와 정신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즉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철학 교수인 아버지 게오르그(파스칼 그레고리)는 인생의 낙이자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읽을 수 없게 되고, 생각하는 즐거움조차 잃어가는 중이다. 가족에 대한 일부 기억을 붙잡고 있지만, 언제까지 자신의 정상적 사고가 지속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산드라에게 안락사를 암시하는 부탁을 한다.

산드라는 아버지의 집 책장에서 지인의 집 책장으로 옮겨진 책들을 보며 육체는 껍데기고 책은 영혼과 같은 것이라, 책이 아버지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아버지의 축 처진 육체는 감당하기에 부담스럽다.

하지만 젊은 산드라가 살아가는 데 있어 몸은 너무 중요하다. 산드라는 클레망과의 육체관계를 탐닉하고 이를 통해 큰 정신적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지고 이를 갈망할수록, 유부남인 클레망과의 관계는 눈물을 흘리게 한다. 기실 육체, 정신, 슬픔과 기쁨은 우리 삶에서 따로 존재할 수 없고 어우러지는 감정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산드라의 어머니로 지금은 아버지와는 남남이 된, 프랑수아즈(니콜 가르시아)는 과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투표했지만, 이제는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격렬 시위에 나서는 인물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일관되지 않는, 모순덩어리다. 프랑스의 자유로움은 불륜 역시 사랑의 한 방식으로 보지만, 영상에 드러나지 않는 클레망의 아내에겐 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주목하는 건 상처받는 화면밖 누군가가 아니라 주인공인 산드라다.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 인생의 중심에 있음을, 그리고 이들이 ‘멋진 아침’을 맞이하길 바란다고 말하는 듯하다.

한센 뢰베 감독은 자신의 영화 중 가장 자전적이라는 이 영화를 아버지의 투병을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는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유럽영화상을 받았다.

13일 개봉하는 페촐트 감독의 영화 ‘어파이어’ 속 주인공인 소설가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은 인간관계 속에서 나를 정립하는 ‘산드라’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독일 병정’을 생각나게 할 만큼 딱딱하고, 방어적인 인물이다. 그는 가까이 다가오려는 사람들을 거부하고 세상을 한없이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우연히 같은 숲 속 집에 머물게 된 ‘나디아’(파울라 베어)는 그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지만, 레온은 “지금은 바빠서”, “일이 놓아주지 않는다”고 말하며 교감을 거부한다. 그래 봤자 그가 진짜로 하는 일이라곤 잠들거나 남의 모습을 훔쳐보는 게 고작이다.

레온은 사람들을 겉모습과 직업으로 평가하고, 그들이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기거나 흉보는 속물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믿지만, 정작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채 자신의 세계에 갇혀, 보잘것없는 삶을 사는 건 그 자신이다. 자기중심적 사고와 자만은 내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바로 코앞에까지 화재가 다가와 있음에도 불에 타 재가될 때까지 그 위험이 얼마나 큰지 미처 깨닫지 못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생각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음을 상기시키고, 우리의 정신이 얼마나 메말라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이 정신 탐구 영화는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뛰어난 작품성을 갖춘 두 거장의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조명하는 사뭇 다른 방식은 비교하는 재미를 준다.

‘어느 멋진 아침’에 레아 세이두가 있다면 페촐트 감독의 영화에선 ‘파울라 베어’의 연기가 주목된다. 베어는 2020년 페촐트 감독의 다른 영화 ‘운디네’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유럽 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관객은 세이두와 베어의 흡입력 있는 연기에 절로 주목하게 된다.


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