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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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건 데이터로 거미줄 검증… 미술품 위작 명함 못 내민다 [이슈 속으로]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DB시스템 2차구축 완료

# 1차보다 방대한 분량
2021년부터 30개월간 3억5000만원 민간자본 들여
회화·입체·서예·동서양화… 17만8306종 자료 수집·분류

# 감정평가 방식은
유명작가 제자들의 습작 중 수준작 골라 서명 위조 방식
붓터치 하나부터 소장이력까지 과학수사 못지않게 꼼꼼히 감정

# 완벽까진 아직 먼 길
작품 직접 그린 작가도 때론 기억 못할 수도 있어
천경자 사건 땐 작품 뒤 다니던 미용실 번호로 확인

# 佛 ‘아트넷’ 꿈꾼다
70∼80년대 위작 번성하자 화랑協 감정 나섰지만 역부족
업계 관련 데이터 필요성 커져 3차 데이터화 작업도 나설 것

겸재 정선은 ‘인왕제색도’ 같은 진경산수화만 그린 게 아니다. 화려하게 채색한 꽃 그림도 남겼다. 신윤복 하면 풍속화부터 떠올리는데 닭싸움을 묘사한 그림도 있다. 서양의 자화상은 얼굴의 좌우가 바뀐 모습이다. 거울을 보고 그렸기 때문이다. 반면 동양에서는 평소 눈여겨보아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려 남이 보는 모양대로 자화상을 담아냈다. 동서양의 차이다. 추사 김정희처럼 여러 개의 호를 사용한 작가가 많았다. 그중엔 한두 번밖에 쓰지 않은 호가 있어 종종 작품이 위작 시비에 휘말리기도 한다. 진품이라도 그림에 써넣는 서명은 시기마다 조금씩 변화했다. 찍는 낙관도 마찬가지다.

 

모르면 속아 넘어가기 쉽다. 위작은 무지의 환경에서 번성한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위작에 속을 일이 없을 법하다. 실로 엄청난 분량의 데이터베이스(DB)가 구축됐기 때문이다.

천경자 서명과 작품을 대조하기 위해 ‘KAAAI DB’에서 인물화, 채색화를 키워드로 도출한 결과다. 작가의 작품 주제, 연도, 재료별로 상세하게 분류한 뒤 작품과 서명을 대조해서 진위를 판단한다. KAAAI 제공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KAAAI, 대표 이호숙·정준모)가 미술품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인 ‘KAAAI DB’의 2차 구축을 완료했다. 2021년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예산 3억5000만원을 들여 DB 2차 구축 사업을 추진한 결과 1차보다 2배가 넘는 수치인 17만8306종, 30만9540건의 자료를 DB화했다.

 

여기에는 회화·입체 5만6000여종, 한국화·서예·공예 7400여종, 해외 미술 1400여종, 미술시장 데이터 11만2000여종이 수록되어 있다. 국내 9개 경매사 1050회 경매 내용 15만7000여건도 포함됐다. 3200여명 작가의 자료 또한 국내와 해외, 장르별, 국가별 등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서명, 소장이력, 전시이력….

 

감정평가는 대개 서명 비교부터 한다. 일명 ‘전문가들’이 모여 작당하고 처음부터 가짜를 만드는 위작은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다. 대다수 위작은 스승의 그림을 따라 그려본 제자들의 습작 가운데 수준작을 골라 서명을 고치는 방법을 택했다. 스승이 쓰던 붓이나 물감 등으로 그린 데다 기법도 닮아 위작 만들기가 비교적 수월했던 것이다.

 

점 하나를 확대해 들여다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우환의 1978년 그림을 본다면, 화면 일부를 비교해보고 선을 관찰한 뒤 점만을 집중적으로 살피는 방법이다. 그해 제작된 작품들의 점을 모두 비교해보며 좁혀간다.

 

누가 가지고 있었느냐를 추적하는 소장이력도 중요하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누구누구를 거쳐 돌아왔는지를 되짚는다.

김창열 1974년 전시도록

전시 당시의 도록은 몹시 귀중하다. 실렸던 작품이라면 작가가 감수했던 진품이므로 꽤 오래된 도록까지도 수소문해 DB에 담아 활용한다. ‘물방울’로 널리 알려진 김창열의 작품 가운데 작가마저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고 판정한 그림 한 점이 위작 누명을 벗은 일이 있다. 1974년 스위스에서 열린 전시회 도록에 당당히 올라 있었던 것이다. “내 자식도 몰라보겠느냐”고 반문하지만 기억에 의존하는 경우 작가도 착각할 수 있다. 원로작가 K, 또 다른 K, 그리고 Y는 자신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고 부정하다가 소장자에게 사과한 일도 있다. 전시이력에도 무게를 두는 이유다.

 

이우환은 2000년 이전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탈리아 밀라노 체류 시절 석채(돌가루) 물감을 구하지 못해 현지 화방에서 구입한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작품이 몇 점 남아있다고 전한다.

 

작품 뒷면 또한 신중하게 살핀다. 서명을 뒷면이나 테두리 옆면에 즐겨 남기는 작가들이 있다. 제작 도중 영감을 적어두기도 하고 일상 메모를 남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작 사건으로 한동안 시끄러웠던 천경자의 ‘미인도’ 밑그림 스케치에는 다니던 미장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감정평가 레시피는 이보다 훨씬 기발하고 과학적인 게 많지만 ‘며느리에게도 안 가르쳐 준다’는 말처럼 공개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자칫 오히려 위작 제작에 이용당할 수 있기 떄문이다.

정준모 KAAAI 대표와 연구원들이 겸재 정선의 ‘화조화’에 쓰인 서명, 인장, 제목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남제현 선임기자

◆수묵채색화에서 단색조 그림까지

 

조선 후기 들어서 도화서 화원들은 여벌의 그림을 그려 광통교(지금 신한은행 본점)에 내다 팔기도 했다. 그 그림을 다시 베껴 그린 민화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당시 광통교 주변엔 지전(종이가게)이 성업했는데 인사동까지 확장했다. 역관 등 중인들이 돈을 벌자 그림이나 도자기를 사모으고 꽃을 키우기 시작했다. 인왕산 밑에서 시회까지 열었다. 사대부들의 취미생활이 중인계층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들에 의해 진경산수화가 인기를 모았다. 우봉 조희룡, 고람 전기 등의 이 무렵 작품들이 나중 1970년대 초중반 콜렉터들의 주요 수집 품목이 된다. 70년대 중반까지는 서양화보다 동양화(수묵채색화)가 강세를 보였다.

 

그러다 1976년 강남지역이 개발되면서 그림의 인기도 서양화로 바뀐다. 북촌과 팔판동, 사간동, 성북동 부자들의 사랑을 받던 이상범, 변관식의 세로 형태 작품들이 한옥에서 천장이 낮은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구상과 반추상의 가로 그림으로 대체되고 만다. 박창돈, 박고석, 이봉상, 정규, 최영림, 홍종명 등의 작품들이 현대1차아파트 거실에 내걸린다.

 

1986년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가 들어서자, 남달리 세련되어 보이려는 욕망에 맞춰 추상화가 인기몰이에 나섰다. 단색조 그림이 한국 미술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우환, 박서보, 김창열 등의 작품들이 주류를 형성했다. ‘눈으로 보고 사는 게 아니라 귀로 듣고 산다’는 말이 나돌았다. 자기의 기호가 아니라 누구 그림이 비싸고 잘 나간다 하더라는 유행에 따라 그림을 구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KAAAI의 등장

 

1970∼80년은 위작 번영기였다. 타격을 입은 화랑협회가 감정평가에 나섰지만 ‘자기들이 판매하고 자기들이 감정한다’는 비판과 불신이 따랐다. 더욱이 1991년 천경자 위작사건이 터지면서 감정평가에 대한 신뢰는 더욱 하락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진품을 주장했으나 작가가 부인해 불신만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2002년 민간단체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이 신설됐다. 여기에는 딜러나 컬렉터보다 미술학자, 비평가, 큐레이터 등이 참여했지만 진위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소송에 휘말리거나 참고인 진술로 불려다녀야 했다. 2005년 이중섭, 박수근 위작 사건이 일어난 뒤에는 국가공인감정기구 설립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일련의 사건 이후 미술품감정평가원은 경영권 다툼의 내홍을 겪다가 활동을 중단했다.

 

4년 전, “그래도 감정평가하는 곳은 있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정준모 대표가 나서 KAAAI를 출범시켰다. 그는 문화정책과 미술비평에 능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출신의 베테랑이다.

정준모 KAAAI 대표는 “17만8306종, 30만9540건의 자료를 DB화했다”며 “법원, 국세청, 금융권에서도 신뢰를 얻어 미술품 담보대출에 활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DB화는 계속된다

 

정 대표는 “미국의 ‘아트프라이스’, 프랑스의 ‘아트넷’처럼 미술 데이터 분석과 미술 자산을 검증할 수 있는 기반 시스템을 갖췄다”고 말한다.

 

센터는 작품가격 감정 데이터 관리에 집중할 계획이다. 공사립 기관과 개인 컬렉터가 미술 자산을 관리할 수 있는 ‘통합 미술등록 관리프로그램’ 서비스도 운영할 예정이다.

 

미술품 자료의 DB화를 통한 관리와 활용은 법원, 국세청, 금융감독원 및 시중은행 등 금융권에서도 신뢰를 얻어 미술품 담보대출에 활용되고 있다.

 

DB 데이터를 활용해 정기적으로 미술시장 분석 보고서도 발행하고 있다. ‘미술품조사분석사’와 ‘미술품관리사’ 자격증 제도도 마련했다.

 

“DB 구축은 정부나 산하기관의 지원을 받지 않고 민간 기업이 자력으로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그는 “다시 4억∼5억원을 조성해 내일을 향한 3차 DB화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