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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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美·베트남 관계의 파격적 격상

“과거 서로 마주 보고 싸웠던 전투기들이 이제는 함께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지난 3월 베트남 남부 호찌민에서 약 35㎞ 떨어진 동나이성 비엔호아 공군기지에서 열린 기념식수 행사에 참석한 마크 내퍼 주베트남 미국 대사가 기지 내에 나란히 전시된 미군 전투기와 베트남군 전투기를 가리키며 한 말이다. 이곳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로 오염된 땅이다. 미국이 3년 3개월에 걸쳐 오염 물질 정화를 마치고 일부 지역을 되돌려주면서 베트남과 함께 기념식수 행사를 가진 것이다.

미국과 베트남은 1975년 베트남 공산화 이후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가 1995년 7월 국교를 정상화했다. 2000년 11월에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전 이후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했다. 2005년 6월에는 판 반 카이 베트남 총리가 정상급 지도자로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했다. 양국은 경제협력은 물론 군사협력 파트너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2006년에는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베트남 국방장관과 회담을 하고 “군사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오랜 적대국이었으나 수교 이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온 두 나라의 관계가 중대한 변환점을 맞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그제 하노이를 방문해 베트남 권력 서열 1위인 응우옌푸쫑 공산당 서기장과 회담을 갖고 양국이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기로 한 것이다. 양국 관계를 두 단계나 격상해 단숨에 최상위로 끌어올렸다. ‘비동맹’을 표방해 온 베트남이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한 나라는 한국, 중국, 러시아, 인도 4국에 불과했다.

양국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것은 중국을 견제하려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미국 입장에서 베트남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제어하는 데 필수적이다. 베트남은 같은 공산국가인 중국과는 정치적 연대를 유지하는 동시에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 미국과 밀착해야 하는 상황이다. 미국에 대한 과거 원한은 묻어두고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베트남의 유연한 실용외교는 한국 외교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박창억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