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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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않은 임신은 재난상황… 생부에게 책임 더 물어야” [심층기획-‘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영아 살해·유기 예방’ 전문가 좌담

“차별적인 시선에 미혼모 고립 심화
임신기 여성 지원할 정책·정보 부족
앙육비 대지급시스템 등 정착 시급”

최근 잇따른 영아살해·유기 범죄를 전문가들은 예기치 않은 임신이란 재난상황을 마주한 여성의 막다른 선택으로 봤다. 사회는 영아살해·유기의 책임을 오롯이 엄마에만 묻는 경향이 짙다. 본지가 지난 8일 사옥에서 진행한 좌담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임신기 여성을 지원할 정책과 관련 정보를 구할 접근성이 부족하다며 궁극적으로 이 범죄가 줄어들려면 사회가 생부에게 더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음지로 숨어들어간 미혼모를 고립시키는 차별적 시선을 거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좌담회에는 김성희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연구관, 오영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 정익중 아동권리보장원 원장,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이 참석했다.

(왼쪽부터) 김성희 경찰대 교수, 오영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 정익중 아동권리보장원장, 허민숙 국회입법조사관. 남정탁 기자

―이번 영아 유기 살해 논란 어떻게 봤나.

 

△오영나 대표(오)=이번에 가해 엄마 중 미혼모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고 나서 미혼모가 영아살해 가해자처럼 부각돼 당황했다. 십수년간 미혼모를 보통의 평범한 엄마로 봐달라 딱 하나 주장해왔다. 미혼모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고 보통의 엄마가 상상도 못할 특수한 상황에 몇 가지 요인이 겹쳤을 때나 벌어지는 일이다.

 

―20년가량 발의만 지속되던 출생통보제가 통과됐다.

 

△허민숙 조사관(허)=이제라도 도입돼서 아동이 등록될 권리가 보장됐다는 안도감이 들면서도, 꼭 이렇게 냉장고에서 두 명의 아기 시신이 발견돼야만 국회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미래를 위해 준비된 국가인가‘라는 당혹감도 들었다. 다만 출산통보제가 만능은 아니기 때문에, 이 제도가 불러올 예기치 않은 효과도 따져봐야 한다. 열악한 위치에 있는 미혼모가 아예 병원에 안 가고 자택에서 출산해 몰래 유기할 가능성이 확대될 수 있어 예방책을 고민해야 한다. 유독 전 세계에서 한국이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구조적 문제는 무엇인지도 논의해야 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위기임신을 한 여성은 어떤 도움을 실질적으로 원하나.

 

△오=영아살해죄 1심 판결문 46건을 분석한 연구결과를 보면 치욕을 은폐할 목적으로 두려워서 저지른 범죄가 40건이다. 저희는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와 상담했더라면 저렇게 다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본다. 프랑스는 임신 기간 의료비를 전액 지원하고 독일은 상담센터가 전국에 몇 백 곳이나 있지만, 우리나라는 임신기 여성에게 국민행복카드로 진료비 100만원 지원하는 게 전부다.

 

△정익중 원장=예기치 않은 임신은 재난상황이다. 부모나 친한 친구에게 못 알리고 고립될 수밖에 없다. 정보가 취약한 분들이 어떻게 현 제도에 접근성을 높일지도 고민해야 한다. 지금은 임신부가 어떤 상담사를 만나는지가 너무 중요하다. 이 우연이 본인이 직접 아이를 키우는 사람도, 입양 보내는 사람도, 불법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산모도 모두 같게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에 촉구하고 싶은 관점의 변화도 있나.

 

△허=사법부가 아주 얕은 수준에서 창피하고 숨기고 싶었을 거라고 미혼모 상황을 판단한다. 깊은 편견이 들어가는 것이다. 더 많은, 다양한 이유를 봐야 한다. 미혼모가 어떤 상황인지 잘 알지 못한 채 엄벌하면 없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김성희 연구관=지금은 미혼모가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 정부가 양육비 대지급 시스템을 정착시켜 생부도 자신의 아이와 임신에 대해서 다른 관념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대담=정지혜 기자, 정리=박유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