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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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사라진 소련의 70년 역사 훑다

러 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공산주의 통치·제국주의 붕괴 담아

레닌 사후 권력투쟁 승자된 스탈린
경제·군사적 성장 이끈 브레즈네프
정치개혁 고르바초프까지 압축 정리

아주 짧은 소련사/실라 피츠패트릭/안종희/롤러코스터/1만7900원

 

1922년 12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남코카서스가 러시아 소비에트공화국에 합류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의 일원이 됐다. 소비에트연방, 즉 소련이 현실의 존재로 탄생했다. 이후 중앙아시아 5개국이 병합되는 등 꾸준히 가입국이 늘어나면서 모두 15개국이 됐다. 소련의 수도는 모스크바였고, 상징은 망치와 낫이었으며, 표어는 다음과 같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소련의 시작은 5년 전인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비롯됐다. 러시아 제정은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졸전을 거듭하면서 무능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1917년 3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레닌은 그해 4월 봉인열차를 타고 귀국한 뒤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가져오자고 선동했다. 결국 10월 페트로그라드에서 봉기가 성공하면서 소비에트 권력이 수립됐다.

1922년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가 1991년 갑작스럽게 사라진 소련의 70년 역사를 압축적으로 정리한 책자가 번역 출간됐다. 사진(왼쪽부터)은 소련의 주요 지도자인 레닌,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고르바초프의 모습. 출판사 제공

레닌과 볼셰비키는 혁명 직후 ‘체카’를 조직해 귀족과 부르주아 재산을 강제로 몰수하는 등 ‘혁명 과업’을 가속화하는 한편, 이듬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빠져나왔다. 곧 내전이 발발해 농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백군을 제압한 뒤에야 공화국을 확실히 지켜내고 소련을 발족시킬 수 있었다.

호주 역사학자인 저자 실라 피츠패트릭은 책 ‘아주 짧은 소련사’에서 1922년 탄생해 1991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련의 70년 역사를 압축적이고 성찰적으로 정리했다. 러시아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의 현장을 역사인류학적 시각으로 투사했다.

1924년 1월 레닌 사후 정치국 내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지바노예프와 부하린, 스탈린 등은 내전의 영웅으로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트로츠키를 먼저 몰아냈다. 남은 이들끼리 다시 권력 투쟁을 벌였고, 웅변가도 이론가도 아닌 스탈린이 최종 승자가 됐다. 당내 소수파 조지아 출신으로 국제적 배경도 없었지만 관료제를 이용해 정적들을 몰아내고 권좌에 올랐다.

스탈린은 1920년대 말부터 5개년 계획을 추진했고, 소련은 1940년까지 연평균 약 17%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집단농장 콜호스를 중심으로 추진한 농업 집단화에는 실패해 심각한 식량 부족 문제를 겪어야 했다. 1937년 나치 독일이 동부 지역으로 팽창할 의도를 보이자 대숙청을 단행해 씻지 못할 과오도 남겼다.

스탈린의 소련은 1939년 9월 히틀러의 독일이 폴란드에 이어 소련을 침공하자 2차 대전에 휩쓸리고, 미국 및 영국과 대연합을 결성했다. 1943년 1월 볼가강변의 스탈린그라드에서 극적으로 승리한 뒤 독일을 밀어붙였고, 1945년 4월 가장 먼저 베를린을 점령했다. 전쟁 기간 공식 700만명, 비공식 2700만명 이상의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은 끝에 미국과 함께 강대국으로 등장했고, 곧 이어진 냉전 체제로 초강대국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1953년 3월, 폭군 스탈린은 미국이 소련을 침략할 것이라는 공포 속에 사망했다.

스탈린 사후 한동안 집단 지도체제가 이뤄졌다가 흐루쇼프가 권력을 잡았다. ‘비밀 연설’로 서구에 널리 알려진 흐루쇼프는 카자흐스탄의 넓은 지역을 곡창지대로 바꾸는 계획을 추진하고, 도시주택을 개량하는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러시아 남부 노동자 파업과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치면서 리더십을 상실, ‘동지적 협력 원칙 위반’을 사유로 1964년 실각했다.

흐루쇼프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한 브레즈네프는 약 20년간 집권을 하면서 정치국원들과 협력 관계를 잘 유지했다. 이 사이 최저임금과 연금이 인상되고, 사회적 격차가 줄었으며, 군사적으로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 국제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2년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차례로 권좌에 올랐다가 노령으로 각각 1년여 만에 사망한 뒤 50대 중반의 젊은 고르바초프가 새 지도자가 됐다. 활기 넘치고 합의를 중시했던 고르바초프는 스스로 혁명을 다시 활성화하는 사람을 꿈꿨다. 결코 ‘구체제의 막내’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실라 피츠패트릭/안종희/롤러코스터/1만7900원

비슷한 시기 경제 개혁을 앞세운 중국의 덩샤오핑과 달리, 고르바초프는 정치 개혁을 앞세웠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슬로건으로 사회적 자유와 당내 민주화를 적극 추진했다. 선거제를 도입하면서 반체제 인사, 급진파들도 대거 당선되도록 했다.

“덩샤오핑의 아들이 말하길, 경제 개혁을 정치 개혁보다 앞세우지 않는 고르바초프를 덩샤오핑은 ‘바보’라고 생각했다. 소련과 중국의 개혁 결과를 비교할 때 이 말은 타당한 판단인 것 같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판단 역시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그는 경제 재건을 반대하는 고착 세력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개혁 성향의 지식 계급이 주도하는 여론의 도움으로 그들을 극복하고 싶어 했다.”

고르바초프가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 집중하는 사이, 유가 하락으로 민생은 어려워졌고, 동독을 비롯해 동유럽들도 차례로 무너져 갔다. 고르바초프 역시 군부의 쿠데타로 권력을 잃었고, 이를 진압한 옐친이 러시아의 새 대통령이 됐다. 1991년 12월25일, 소련 연방은 고르바초프의 실각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강력한 군대와 경찰 그리고 최근까지 약 2000만명의 당원을 보유한 집권당이 있어 겉보기에 안정된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은 붕괴를 막기 위해 총 한 발 쏘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