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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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 말소, 이사 등 온갖 꼼수”… ‘도망간 아빠’ 찾아 삼만리 [심층기획-‘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⑥도망간 아빠 찾아 삼만리
지난 6월 ‘수원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을 계기로 이뤄진 정부 전수조사 결과, 2015년부터 8년간 출산 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이 2123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 안타깝게 유기되거나 세상을 떠난 아기들의 사연이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세계일보는 영아유기·살해가 개인 일탈이 아닌 ‘사회 문제’라는 인식 아래 판결문을 분석하고, 영아의 생부모 사연을 심층적으로 추적했다. 이를 통해 드러난 영아유기·살해 범죄의 이면, 아동·여성 보호와 복지 시스템의 민낯을 특별기획 시리즈 ‘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연재로 소개한다.

 

유난히 앳된 의뢰인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일까. 윤인권 변호사는 오늘따라 더 초조하다. 이제 막 성년이 된 의뢰인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만난 남자의 아기를 낳고 미혼모가 됐다. 경제 활동도 하지 않고 나이도 너무 어린데 원가족이 아기를 돌봐줄 환경도 못 된다. 양육비 소송마저 진다면 정말 힘들어질 상황이다.

 

남자에 대해 아는 정보는 전화번호, 실명인지 가명인지 모를 이름 두 가지 뿐이다. 인터넷으로 만난 관계일 때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소송을 진행하려면 상대의 인적 사항부터 파악해야 하는데, 만약 진짜 이름이 아니라거나 본인 명의가 아닌 번호를 쓰고 있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조회를 요청한 번호와 명의자가 불일치할 경우 통신사에서 회신을 해주지 않아 주소지 등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아이 아빠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미혼모 관련 소송을 담당해 온 윤 변호사는 이번 취재를 계기로 그동안 경험한 양육비 소송을 되짚어 봤다. 소송 대상인 남자들은 연락 받는 걸 피하긴 해도 아주 찾을 수 없는 경우는 잘 없다. 하지만 기껏 찾은 이들 대부분은 ‘무응답’이다. 법원에 와서 자기 입장을 얘기할 정도면 그나마 책임감이 있는 편이다. 혹은 소송을 건 여성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해 대고 “내가 언제 낳으라고 했냐”는 식으로 나온다.  

 

윤 변호사에 따르면 미혼부들은 인지 청구를 통해 법률상 아버지, 친부로서의 의무를 지게 되는 상황을 대개 회피한다. 하지만 그랬을 때 그들이 받는 건 약간의 사회적 지탄이 전부다. 크게 이슈화되지도 않는다. 워낙 그런 경우가 많기도 하고 미혼모 입장에 대한 공감대가 떨어지다 보니 뉴스거리가 안 되는 것이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부양 의무를 져버리고 간 아빠를 찾아 법적 책임을 지우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난하다. 친부가 되게 만드는 인지 청구 → 양육비 심판 청구 → 양육비 이행명령 제도(불이행 시 감치나 과태료 신청)로 이어지는 과정은 하나 같이 가시밭길이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남자가 잠적했거나 하룻밤 관계인 경우 등은 맨 앞에 장애물이 추가된다. 소송장 전달부터가 힘들어 시작도 하기 전에 진이 빠지곤 한다.

 

2020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양육비해결모임 관계자들이 양육비 감치 집행을 못하는 경찰의 감독 책임을 물어 경찰청장을 직무유기로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자 집에서 되레 화를 냈다

 

“우리 딸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됐는데 (아이 아빠는) 그렇게 일상생활 똑같이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재인의 부모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미혼인 딸의 출산에 행동으로 책임지지 않는 소극적인 아이 아빠 탓이다. 같이 키우겠다고 해 아기를 낳게 만들었으면서 막상 그에 맞는 언행은 없었던 것이다. 화를 참지 못한 하루는 남자 집에 쫓아갔다가 감정이 격해져 남자의 뺨을 때렸다. 

 

그쪽 부모는 똑같이 화를 냈다. “내 아들도 소중한 아들”이라면서 너무 당당한 태도였다. 그래도 아기 아빠인데 같이 살아볼까 생각했던 재인의 마음도 돌아섰다. 시설에 갈 때 너무 힘들어 딱 한번 양육비를 달라고 연락했더니 남자는 “알아서 키우려면 키우고 양육비 받을 거면 아이를 나한테 보내라”고 했다. 그 길로 남자와는 영영 연락을 끊었다.

 

민지도 양육비 소송을 진행하면서 남자 쪽 부모로부터 원망을 들었다. 자기 아들한테 소송을 걸었다는 것 자체에 화가 난 것 같았다. “직업도 없는 아들한테 어떻게 소송을 거냐”는 식이었다. 당장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민지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었다. 

 

‘백수인 게 알 바야? 난 일단 애를 키워야 돼. 애가 지금 태어났잖아! 본인들도 다 알고 있으면서.’

 

남자 역시 “네가 이렇게까지 할 줄 몰랐다”고 했다. 소송장이 날아가기까지 5~6개월이 걸렸는데 그동안 일부러 소송 얘기를 안 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건 아이가 태어난 뒤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는데도 ‘지금 돈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며 버티던 남자의 태도에 민지가 조용히 소송 절차를 밟았기 때문이었다. 

 

송장이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면 남자들은 받지 않으려고 주민등록 말소를 하거나 주소를 옮기는 등 온갖 꼼수를 동원한다. 민지처럼 머리를 쓰고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서야 겨우 법적 효력이 있는 양육비 합의가 이뤄지곤 한다.

 

윤 변호사에 따르면 양육비 사건은 의뢰인들의 불만이 가장 많은 사건 유형 중 하나다. 법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고, 그 간극은 좁혀질 기미가 없어서다. 남성이 자력이 없는 경우라면 최하 월 20만~30만원 수준으로 결정되는데 아이를 키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상대 남성들은 정상적인 직업이 없거나 학생이거나 나이가 어린 그런 케이스가 많았고요. 어떤 식으로든 자기가 책임을 지려고 해야 하는데 그걸 회피하는 것 자체가 일단은 문제가 있죠. 사실 인지 청구하고 양육비 소송해서 결정 판결은 잘 나와요. 근데 실질적으로 돈을 받느냐, 양육비 집행이 되느냐를 보면 별개로 또 어려움이 있더라고요.”

 

마침내 돈이 입금되어야만 양육비 소송의 목적은 달성된다. 양육비 ‘집행’이 이뤄지지 않으면 기껏 벌인 소송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를 돌보는 시간과 통장 잔고를 쪼개어 힘겨운 절차를 다 거쳤는데, 결과적으로 돈을 받지 못하고 그걸 사실상 처벌하는 것에도 소극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의 억울함은 쌓일 수밖에 없다.

 

양육비이행관리원의 양육비 관련 진행 절차. 양육비이행관리원 제공

◆수년째 제자리걸음인 양육비 문제

 

양육비 이행을 안 하면 감치(경찰서 유치장·교도소 또는 구치소에 가두는 것)도 하고 운전면허증도 뺏는 등 법이 강화됐다는데, 현실에선 아직도 여성들이 돈을 못 받고 있다. 현미경을 대면 숭숭 뚫린 구멍이 보인다. 현장에서만 감지할 수 있는 그런 디테일은 국회나 정부 관계 기관까지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일까.

 

여전히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윤 변호사로부터 들었다. 감치 결정이 나와도 감치 집행으로는 잘 이어지지 않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감치 결정조차 안 나오는 경우도 잦다. 여기서 의뢰자들의 불만이 폭발한다. 

 

이행명령상 양육비를 세 번 이상 정당한 이유 없이 지급하지 않으면 감치를 신청할 수 있지만, 서울가정법원은 감치 결정을 내리는 것에 보수적인 편이다. 운전면허 제한과 출국금지 등 일명 ‘배드파더스’에 대한 제재가 추가되면서 불이익이 커지다 보니 오히려 감치 결정에도 신중해진 경향이 있다는 관측이다. 미혼부 책임을 강화하겠다고 개정한 법이 기묘하게도 그 목적 달성을 가로막는 현실이다.

 

한 번은 상대 남성이 주민등록상 주소지에 살고 있지 않아 이행 명령 서류를 계속 못 받거나 안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 경우라도 이행 명령 결정은 나오기 때문에 윤 변호사 측은 그에 따라 감치 신청을 했다. 그런데 법원은 감치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당사자가 결정문을 받지 못해서 변제하지 못한 것이므로 변제하지 못한 것에 정당한 이유가 없다고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추가 제재 조치가 시행된 지 2년이 된 지난 6월 기준 677명이 제재 대상에 올랐다. 이 중 양육비 지급을 이행한 건 61명이다. 가장 오랫동안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자의 미지급 기간은 18년4개월에 달했다.

 

여성이 주로 겪는 문제에는 아무래도 사회의 관심도가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윤 변호사는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꾸 알려서 ‘입법적 결단’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자연 상태로 내버려두거나 ‘책임 안 지는 아빠들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다’는 정도의 인식으로는 어떤 변화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진짜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한다고 해야 되나요? 본인 삶 꾸려가기도 어려운 경우가 있어요. 근데 저는 기초생활수급비 60만원, 70만원 받는 분한테 양육비 21만원 받아냈습니다. 알아요. 본인도 그 돈으로 생활 안 되는거. 하지만 자녀는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랄 수 없는 존재거든요.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서 양육비를 줘야죠. 경제적으로 무능하다는 걸로 항변할 때 이거는 봐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관련 기사>

 

[심층기획 - ‘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프롤로그 - 유령아빠, 불행의 씨앗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0509604

 

①[단독] 애 아빠 없이 ‘나홀로 출산’… “극도의 패닉 상태서 범행”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0508352

 

②‘국가의 부재’ 속에 아기가 떠난 그날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2500544

 

③벼랑 끝 내몰려 ‘아이 버릴 결심’ 하기까지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3500163

 

④아빠가 먼저 ‘두 사람’을 버렸다…부양 점수 5점 만점에 1.3점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3520264

 

⑤“엄마를 보호하는 게 영아 지키는 길”… ‘비정한 모정’ 다시 본 그 판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00252

 

⑥“주민등록 말소, 이사 등 온갖 꼼수”… ‘도망간 아빠’ 찾아 삼만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13897

 

⑦“책임 안 지면 빨간 줄…‘히트앤드런 방지법’, 왜 안 생기나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13915

 

⑧외국인 미혼모와 ‘무등록’ 아동…“아이 성년 되면 생이별”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9510570

 

⑨“가부장적 체류 제도가 ‘투명 아동’ 양산…핏줄·혼인 중심 틀 깨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0510203

 

⑩‘살아남은 유기 영아’ 이야기…원가정도, 새 가정도 없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0512263

 

⑪“누구에게도 기댈 생각을 못해요”… ‘버팀목’ 없이 고립되는 청년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2502617

 

⑫[좌담회] “예기치 않은 임신은 재난상황…생부에게 더 책임 물어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2513086

 

에필로그 - 이중잣대에 지친, 미혼모들의 속마음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4502371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