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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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외교사절도 감탄한 조선의 풍류음악…‘상생과 회복’ 내걸고 확 변신한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

지난 16일 전주 한옥마을에서 가까운 옛 전라감영의 ‘선화당’. 조선시대 호남과 제주를 관할했던 전라감영의 책임자인 전라감사가 집무하던 이 곳에 거문고와 단소, 대금, 피아노가 나오기 전 건반 악기인 하프시코드 선율이 ‘따로 또 같이’ 아름답게 퍼졌다. 전날 개막한 2023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이틀째 공연 중 하나인 ‘풍류뜨락’에서다. 이 공연은 18세기 전후 유럽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악기인 하프시코드 연주와 같은 시기 조선 선비들이 즐기던 풍류음악이 어우러지도록 한 것이다. 당초 한옥마을 내 풍광이 수려한 경기전(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 야외 무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비 때문에 장소가 선화당으로 바뀌었다.

 

오전 10시부터 70분가량 하프시코드와 국악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가곡(조선시대 선비들이 향유한 성악곡)이 잔잔하거나 영롱하게 어우러지며 주한 외교사절 등 100명 가까이 들어찬 내외국인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관객들은 헨델의 미뉴에트 사단조를 시작으로 가곡인 우조 이수대엽 ‘버들은’, ‘수룡음(기악 반주음악)’, 계면조 ‘태평가’ 등 7곡이 연주될 때마다 큰 박수를 보냈고 다채로운 소리의 조화가 빚어낸 매력에 푹 빠졌다. 

 

이날 오후에는 한국소리의문화전당에서 만능 소리꾼 이자람의 창작 판소리 대표작 ‘노인과 바다’, 이봉근의 ‘적벽가’ 완창 판소리,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악단광칠’의 신명나는 굿판, 중국·베트남·아랍에미리트·칠레 예술단 무대 등이 많은 관객과 만나 갈채를 받았다. 

 

앞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극장(모악당)에서 축제 서막을 연 개막공연(연출 이소영)도 ‘상생과 회복’이란 주제에 걸맞게 국악과 양악이 하나가 돼 수준높은 음악을 빚어냈다. 지휘자 성기선이 이끄는 전주시립교향악단의 연주로 시작한 첫곡은 ‘아리랑 환상곡’이었다. 1976년 북한 작곡가 최성환이 민요 아리랑을 환상곡 풍으로 편곡한 곡이다. 지휘 거장 로렌마젤 지휘로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북한 동평양 대극장에서 공연한 뒤 국내외 유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되는 ‘아리랑 환상곡’은 이날도 애잔하고 유려한 선율로 2000석 규모의 공연장을 감쌌다. 

이어 전주시향과 가야금 연주자 문양숙이 25현 가야금협주곡 ‘바람과 바다’를 협연했다. 이 곡은 전통 타악기인 장구와 꽹과리, 징이 중심이 된 동해안 별신굿의 장단과 선율을 재료로 지어졌는데, 이번 축제 개막공연을 위해 서양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개작돼 초연됐다. 

 

전통 소리꾼과 오페라 가수들이 부르는 우리 노래도 아름다웠다. 평소 무대와 다르게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오른 정상급 소프라노 서선영(‘새야 새야 파랑새야’, ‘밀양아리랑’)과 바리톤 김기훈(오페라 ‘박하사탕’ 중 ‘나무꾼과 선녀’, ‘뱃노래’)은 물론 젊은 소리꾼 김율희(판소리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와 고영열(‘북’)의 열창도 관객 탄성을 자아냈다. 한국 최초의 창작오페라로 1950년 5월 서울 종로구 부민관에서 초연된 ‘춘향전’ 중 ‘사랑가-한번을 보아도 내사랑’(서선영·김기훈), 1961년 만들어진 남도 민요 ‘동백타령’(김율희·고영열) 듀엣 무대 역시 돋보였다. 개막공연의 마지막은 ‘꿈’으로 장식했다. 작곡가 최우정이 오펜 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이야기’ 중 ‘뱃노래’와 남도 민요 ‘거문과 뱃노래’, 경상도 민용 ‘뱃노래 및 자진뱃노래’ 등 6곡의 동·서양 뱃노래를 모티브로 해서 지은 4중창 곡이다. 서선영, 김기훈, 김율희, 고영열이 절묘하게 합을 맞한 노래가 국악기와 서양 악기의 조화로운 반주에 올라 타며 멋진 무대를 보여줬다. 공연장을 가득 채운 내외국인 관객은 아낌없는 환호로 화답했다.

코로나19 사태 여파로 4년 만에 제대로 열리게 된 제22회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오는 24일까지 열흘간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등 전북 14개 시·군에서 소리의 대향연을 펼친다. 평균 연령이 82세에 달하는 김일구(‘적벽가’)·김수연(‘수궁가’)·정순임(‘흥부가’)·신영희(‘춘향가’)·조상현(‘심청가’) 명창이 제자들과 판소리를 완창하는 ‘국창열전 완창판소리’를 포함해 11개국 89개 프로그램이 108차례 공연된다.  

지난 15일 개막해 오는 24일까지 열흘간 진행되는 2023 전주세계소리축제의 개막공연 등 다양한 공연 장면과 행사장 모습. 전주세계소리축제 제공

이왕준 조직위원장은 “올 축제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전주세계소리축제가 보완·보강해야할 점을 철저히 준비하면서 (‘축제 열차’ 운행 등)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했다”며 “축제가 (전주와 전북을 넘어) 전국화·세계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주=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