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의료진 과실 증명 쉽지 않아”… 대법원, 의료사고 환자 측 민사 입증 책임 완화

의료사고에 대한 민사분쟁에서 환자가 과학적 의심이 없는 수준의 증명을 할 필요는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의 증명을 요구하는 형사사건과 달리 민사에선 환자 측의 입증 책임을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A(당시 73세)씨 유족이 한 의료법인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가 일부 승소한 원심을 지난달 31일 확정했다.

 

A씨는 2015년 12월 서울의 한 병원에서 어깨 수술을 받던 중 혈압이 떨어져 심정지로 숨졌다. 수술을 담당한 이 병원 마취과 전문의 B씨는 수술 당일 오전 10시15분쯤 전신마취와 부분마취를 진행하고, 10시42분쯤 간호사에게 상태를 지켜보라고 지시한 뒤 수술실을 나왔다. 

이후 A씨가 저혈압과 산소포화도 하강 증세를 보이자 간호사는 B씨에게 네 차례 전화했다. 최초 전화에서 B씨는 교감신경 촉진제인 에페드린 투여를 지시했고 두번째 전화는 받지 않았다. 세번째, 네번째 전화를 받고 수술실로 돌아온 B씨는 A씨에게 혈압상승제 등을 투여했지만 회복에 실패했다.

 

B씨는 수술을 중단하고 심폐소생술을 시행했다. A씨는 인근 대학병원으로 전원 됐지만 응급실 도착 직후인 오후 1시33분쯤 숨졌다. 부검이 이뤄졌지만 사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A씨 유족은 병원 법인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하급심 법원은 마취 중 환자에 대한 감시 업무를 소홀히 한 B씨에게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응급상황에서 간호사의 호출에 즉시 대응하지 못했고 제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못한 잘못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1·2심 법원은 그러면서 의료법인이 약 9000만원의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병원 측은 주의의무 위반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없다며 상고했다. 기존 대법원 판례 역시 환자 쪽에서 의료상 과실 행위를 입증할 것을 요구할 뿐 아니라 기존 질병 등 다른 원인이 없다는 점도 증명해야 했다.

 

이번 사건을 심리한 대법원은 의료과실 민사소송에서 환자 쪽이 법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책임을 완화해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의료행위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로서 환자 측에서 의료진의 과실을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고, 현대의학 지식 자체의 불완전성 등 때문에 진료상 과실과 환자 측에게 발생한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는 의료진 측에서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뉴시스

재판부는 “환자 측이 통상의 의료인에게 요구되는 주의의무의 위반을 증명하고 이 과실이 손해를 발생시킬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한 경우, 진료상 과실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정하여 인과관계 증명책임을 완화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환자 쪽이 과학적·의학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개연성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도 봤다.

 

다만 “과실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의학적 원리에 부합하지 않거나 해당 과실이 손해를 발생시킬 막연한 가능성이 있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는 증명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기준도 설정했다. 이런 인과관계가 추정되는 경우에도 병원 측이 진료상 과실이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면 이런 추정을 번복시킬 수 있다고도 했다.

 

대법원은 같은 날 의사 B씨에 대한 형사사건 판결도 선고했다. 항소심 법원은 의사의 업무상과실치사·의료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금고 8개월과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그러나 의사의 진료상 과실이 피해자의 사망을 야기했는지 증명이 부족하다며 다시 재판하도록 사건을 돌려보냈다. 의사가 수술실에 남아 대응했다면 A씨가 사망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더 살펴봐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 관계자는 “민사사건과 달리 형사사건에서는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의 증명’이 기준이고 (민사사건의) 인과관계 추정 법리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종민 기자 jngm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