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안내로 십자가 위에 ‘베드로의 닭’이 있던 곡성성당에 갔다. 1827년 정해박해 당시 교우촌을 이루고 있던 천주교도들을 잡아서 가둔 감옥이 있던 자리에 지은 성당이라는 의미에서, ‘옥터성지’로도 불린 곳이었다. 지인과 함께 간 성당의 뒤편에는 정해박해 당시의 감옥이 복원돼 있었다. 감옥을 처음 본 순간, 그는 전율했다.
“감옥을 보며 뭔가 전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원래 제가 쓰고 싶었던 건 1800년부터 1850년 사이 조선이었어요. 19세기 조선에 어떤 일들이 있었던가를 쓰고 싶었죠. 그런데 19세기 조선을 그곳에서 만난 것이죠.”
1800년대 조선을 그리는 것은 소설가 김탁환에게 오래된 숙제였다. 백탑파 시리즈로 1700년대 영정조 시대를 훑고 개화를 다룬 몇몇 소설로 이 땅에 자본주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살폈지만, 19세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늪이었다.
“19세기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늪처럼 내 앞에 놓였다. 나라는 있되 정치는 실종되고, 예절을 강조하되 극악과 무도가 판을 쳤던 시절이다. 대를 이어 억울하고 대를 이어 원통한 나날이기도 했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분출한 민란의 시대였다.”(1권, 7쪽)
십 년 전쯤, 19세기 조선을 소설로 쓰려고 했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이 터졌고 이듬해 메르스 사태가 이어지면서, 도서관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사회파 소설을 연달아 쓰는 동안 40대가 훌쩍 지나갔다. 19세기를 담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정해박해 당시 500명이나 되는 대규모 조직 사건으로 확대되는 이야기만 쓰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취재를 하고 이야기를 구상하는 동안 궁금해지는 게 있었어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27년까지 사제도 없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냈을까, 어떻게 박해 이후 1839년까지 장기수로 수감돼 옥중수기를 쓰게 됐을까. 이것까지 다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됐습니다.”
곡성에 내려와 소설을 쓰는 동안, 그는 다시 곡성성당 바로 옆으로 이사를 왔다. 어둑새벽 밭으로 나갈 때마다 성당 뒷마당 신부님 댁과 길 건너 수녀님 댁엔 불이 환했다. 밭을 매다보면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호미를 쥐고 감옥 자리를 향해 선 채로 서른세 번의 종소리를 들었다. 기도하지 않아도 기도하는 마음이 됐다. 그 마음을, 소설과 문장 속으로 넣었다.
“나는 희망과 절망, 미움과 사랑, 의심과 믿음을 갈라 언행을 평하고 답을 구하진 않았다. 편을 가르는 순간,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긴다. 둑엔 금이 가고 마을은 무너진다. 배교와 치명 사이, 교우 마을과 외교인 마을 사이, 신과 인간 사이를 더 오래 들여다보고자 했다. 흐릿하고 복잡하고 지루한 혼돈의 날들이여! 스미고 젖어 빛이 되기도 하고 어둠이 되기도 했다. 빛이 어둠이었고 어둠이 빛이었다.”(1권, 8쪽)
『불멸의 이순신』 『허균, 최후의 19일』 등 많은 역사소설을 써온 소설가 김탁환이 1827년 정해박해를 배경으로 한 대하 장편소설 『사랑과 혁명』 (3권, 해냄)을 들고 돌아왔다. 작가의 서른한 번째 장편소설로, 작품 배경인 곡성에서 4년을 꼬박 매달린 끝에 원고지 6000장 분량의 대작을 완성했다.
소설은 땅만 섬기던 장선마을 농사꾼 ‘들녘’이 하늘만 믿던 덕실마을의 ‘아가다’를 만나서 세상이 금지한 천주를 믿어가는 과정과, 그 신을 믿기 위해 목숨을 건 교우들과, 이들을 추적하고 탄압하는 무리들간 팽팽한 긴장과 갈등과 좌절을 담고 있다. 천주교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인 ‘치명록’ 형식을 차용해 액자식 구성을 띤 작품은 정해박해를 기점으로 그 전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배경으로 생활과 종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천주교인들의 시간을 따라간다. 제1권에서는 곡성 교우촌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옹기를 만들며 사랑을 빚는 시간을, 2권에서는 천주교인과 첩자, 군관이 숨고 달아나고 쫓고 쫓기는 추적의 시간을, 3권에선 옥 밖에서 다시 신부를 모셔오기 위한 움직임과 희망의 기다림을 담고 있다.
김 작가는 19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그간 쓴 역사소설 중 가장 어깨에서 힘을 많이 뺀 소설”이라며 “1800년대 암흑기를 다루면서 그 암흑기 속에서 어떻게 마을을 만들 것인지가 큰 화두였다”고 말했다.
천주교 박해 사건이 중심이지만, 종교소설로만 이해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정해박해에 대해 다뤘지만) 천주교와 천주교가 아닌 것들의 충돌에 관해 쓴 것이기 때문에 천주교 소설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며 “곡성에서의 제 경험과 마을 이웃의 경험도 녹아있다 보니 생태소설이나 사회소설 같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저는 역사소설을 쓰면서 옛날 이야기를 쓴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역사 소설을 쓰지만 사실은 정치소설을 쓰는 거다, 역사를 가지고 지금 당대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해 왔어요.”
그는 앞으로도 곡성에서 마을 소설가의 생활을 이어갈 계획이다. 마을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고 고민하고 깨달은 것을 써가겠다고. 이미 마을에 소설 주인공의 이름을 딴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을 내기도 한 그였다.
“곡성에 가면 골짜기들이 있는데, 1800년대에는 천주교 신자가 지나갔던 그 길을 이후 30, 40년 뒤에 동학도들이 다시 가고, 또 해방 이후에는 빨치산들이 그 산길을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황폐한 야생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는 굉장히 역사의 두께가 있고 그 속에 사람들이 살고 있죠. 시대정신이 깃든 그 골짜기를 보면 생각이 들어요. 제가 곡성에 간 것도, 옥터 옆에서 밭을 일구면서 소설을 쓰게 된 것도 모두 운명인가, 1800년대를 잘 쓰라고 소설의 신이 저를 이곳으로 보내신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