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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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슈퍼컴퓨터, 농업의 디지털 전환 앞당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최초의 우주 궤도 비행 프로젝트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면 천재 수학자들이 수식을 풀기 위해 수개월 동안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끊임없이 계산을 반복하고, 골몰하는 과정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비밀 병기는 바로 컴퓨터다. 1969년 인류 최초 달 탐사가 성공하고, 그로부터 5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1초에 100경(10의 18제곱)번 연산이 가능한 ‘엑사스케일’의 슈퍼컴퓨터 등장으로 우리는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늘 그래 왔듯 인류의 발전은 기술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은 농업 분야에서도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시각이 대세다. 농업은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경제의 근간이 되며, 꾸준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하지만, 최근 세계적으로 급변하는 정세와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 등 불확실성이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 방안의 하나로 디지털 기술과 슈퍼컴퓨터 활용이 급부상하고 있다.

조재호 농촌진흥청장

디지털 기술은 농작물 생산부터 판매에 이르기까지의 유통 과정 전반에 걸쳐 효율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산지에서 소비지에 이르는 전 과정을 디지털화하고, 빅데이터 분석으로 농산물 품질을 판단하며 유통의 효율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국제 농산물시장의 변동성을 실시간으로 빠르게 파악하고, 대응 전략을 마련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로써 디지털 기술, 특히 인공지능(AI)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특히 빅데이터를 학습한 AI를 활용해 재배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재해를 예측하고 적절한 대응 방안을 제시해 피해를 최소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재배 예정 지역의 기후, 작물, 토양 조성 등의 정보를 미리 학습한 AI가 최고의 품질로 최대의 생산이 가능한 재배 조건을 제안하거나 병의 발생을 예측하는 일, 나아가 가장 효과적인 방제법을 제시해 농가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 역시 슈퍼컴퓨터이기에 가능한 시나리오다.

농업의 디지털 전환을 대표하는 주요 키워드 중 또 다른 하나는 디지털 육종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육종 방법, 즉 사람이 직접 작물을 재배하며 성장 과정을 관찰해 기록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좋은 종자를 얻는 육종 기술은 작지 않은 노동력과 시간을 요구한다. 반면, 디지털 육종은 수십 년 동안 기록된 작물의 정보를 디지털 데이터(빅데이터)화하고, 이를 학습한 AI가 원하는 형질을 예측하고 선발할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최적의 품종을 신속히 개발할 수 있게 한다.

농업의 성공적인 디지털 전환을 위해서는 빅데이터를 효율적으로 분석하고, AI 학습모델을 개발·활용하는 일이 관건이다. 농촌진흥청은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2018년 슈퍼컴퓨터 1호기를 도입했다. 최근에는 1호기보다 성능이 29배 뛰어난 슈퍼컴퓨터 2호기를 도입하면서 ‘농생명 슈퍼컴퓨팅센터’ 준공(9월21일)이라는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앞으로 슈퍼컴퓨팅 인프라가 없는 연구 기관, 종자회사에서 디지털 육종, 농업 기상 예측 등에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정보를 개방하고 기술도 지원하는 등 다양한 활용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언제나 인간을 향해 진화하고, 인류의 삶을 변화시킨다. 농업이 슈퍼컴퓨터를 만날 때 상상은 현실이 된다.


조재호 농촌진흥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