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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잣대에 지친, 미혼모들의 속마음 [심층기획-‘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에필로그
지난 6월 ‘수원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을 계기로 이뤄진 정부 전수조사 결과, 2015년부터 8년간 출산 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이 2123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 안타깝게 유기되거나 세상을 떠난 아기들의 사연이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세계일보는 영아유기·살해가 개인 일탈이 아닌 ‘사회 문제’라는 인식 아래 판결문을 분석하고, 영아의 생부모 사연을 심층적으로 추적했다. 이를 통해 드러난 영아유기·살해 범죄의 이면, 아동·여성 보호와 복지 시스템의 민낯을 특별기획 시리즈 ‘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연재로 소개한다.

 

 

연재의 마지막 편은 취재원들이 솔직하게 드러낸 속마음 발언을 중심으로 정리한다. 앞선 기사에서 다 전하지 못한 미혼 한부모 여성과 관련 단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긋지긋한 낙인과 편견

 

비혼 여성 93%는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불안을 경험한다(오픈서베이·알보젠코리아, 20대 비혼 남녀 피임 인식 및 이용 행태 조사)고 한다. 혼인 상태가 아닐 때, 아기를 키울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의 ‘위기 임신’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교통사고 같은 일이죠. 솔직히 20살 넘은 성인 중에 관계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들 중에 그냥 한 번의 실수 혹은 우연으로 임신이 되는 거예요. 똑같이 성관계 경험이 있는데 임신한 사람만 ‘천박하다’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게 맞는 건가요? 더구나 숭고한 생명을 품고 있는 일인데 말이에요.” (미혼모 박모씨·21,서울)

 

혼인 관계가 아닌 남성과 여성 사이에 덜컥 아이가 생긴다는 것. ‘결혼 여부’라는 단 하나의 조건이 다를뿐인데 어떤 임신은 집안의 경사가 되고, 어떤 임신은 남부끄러운 취급을 받는다. 주변의 편견 없는 위로와 응원이 중요하다고 미혼모들은 말했다.

 

“전 남자친구는  제가 입양을 안 보낸 거니까 저보고 혼자 알아서 책임지라고 했어요. 혼자 산부인과에 갔는데  시선들이 곱지 않았죠. 아무에게도 임신을 들키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했어요.” (김모씨·23, 천안)

 

“저처럼 임신, 출산, 육아를 혼자 하는 사람들의 불안을 덜어주려고 상담사가 됐죠. 전 30살에 빚만 있는데, 덜컥 임신했어요. 생부는 잠적했고, 일하던 편의점에선 잘렸죠. 10년 전엔 미혼모를 안 좋게 봤으니까요. 지금도 비슷해요. 홀로 아이를 키우는 아빠에겐 찬사가 쏟아지지만, 미혼모에겐 ‘함부로 놀았네’ 비난하죠.” (정수진·42, 한국미혼모가족협회 상담팀장)

 

◆성별에 따라 다른 무게감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부모가 될 운명에 처한 남녀의 인생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예기치 못한 위기 임신 앞에서 무섭고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수행하는 책임의 무게는 양쪽이 너무나 다르다. 

 

“영아 범죄에서 아빠가 주는 영향이 80%는 될 거에요. 아이는 같이 책임지는 건데, 몸 망가지고 안 좋은 건 나혼자 감당해야 해서 힘들었어요. 남자는 몸만 떠나면 끝이죠.” (A씨·23, 경남)

 

취재진이 만난 많은 미혼모는 아이가 생긴 뒤 너무 달라진 여성과 남성의 삶을 증언했다. 이를 종합하면 여성이 “임신을 하면서 솔직히 모든 걸 포기해야 되는 순간”이 되어 대학도 포기하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남자친구는 그게 아니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고 학교도 계속 다니는 것”을 보면서 “여자만 삶이 너무 달라진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임신 기간 친구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보면서 출발점부터 다르다는 사실에 부럽고 괴롭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나기 힘들다.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지? 왜 이렇게 혼자 외로워야 되지” 같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 했다. 실제로 대학교 휴학과 자퇴를 한 경우도 많았다. 

 

자신의 신체에서 아기가 나오기에 이 무거운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여성과 달리 남성은 빠져나갈 구멍이 상대적으로 많다. 실제로도 상당수가 자취를 감춘다. 같은 시공간을 점유하던 둘의 삶은 임신과 출산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진다. 공정한 사회라면 정책과 법안 등으로 그 차이를 좁혀야 한다.

 

“법이 약하니까 머리 잡아뜯고 두드려 패도 양육비 안 줍니다. 그럼 나라에서 법을 강화해서 약자들을 보호해 줘야죠. 유전자 검사해서 아빠 찾아내야죠. 요즘 시대에 못 한다고요? 하기 싫은 거지.” (배모씨·58, 서울)

 

지난 7~8월 미혼모·관련 단체 20명 인터뷰 발언 갈무리

◆빼앗긴 모성과 보호출산제

 

오랜 시간 우리 사회에서 혼인 관계가 아닌 여성에게는 모성을 가질 권리조차 없었다. 미혼모가 아이를 낳으면 바로 뺏다싶이 해서 입양을 보내버리는 식이었다. 미혼모의 모성은 불완전하다는 이유에서다. 출생 인구 수 대비 가장 많은 아이들을 해외 입양 보내는 ‘아동수출국’의 오명은 이런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아이를 키우고 책임지려는 여성을 향해 ‘아이가 불행해질 텐데 욕심 부린다’며 오히려 손가락질 하는 일도 흔했다.

 

“미혼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몰래 낳고 보내면 된다’는 식으로 자꾸 비밀에 부치려 하죠. 미혼모 낙인 찍지 말고 여성의 낳을 권리, 키울 권리를 오롯이 선택하게 해줘야 합니다.” (최형숙 변화된미래를만드는미혼모협회 인트리 대표)

 

산모의 익명 출산을 허용하자는 ‘보호출산제’에 대해 미혼모 단체들이 우려를 표하는 바탕에는 이런 역사가 있다. ‘혼자 아이 키우기 힘드니 바로 입양을 보내라’고 강권 받던 시절과 무엇이 다르냐는 지적이다. 이는 빼앗긴 모성을 되찾는 흐름이 아니라 빼앗긴 채 두는 측면이 있다. 

 

임신·출산·양육 전 과정에서 여성이 가져야 할 주권(재생산권)이 보장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이고 우선적으로 추진돼야 할 방향이란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여성의 임출육 관련 지원과 미혼부 책임 강화 등을 병행함으로써 보호출산제는 최후의 보루로서만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형숙 인트리 대표는 “현 상황에서 보호출산제를 해결책으로 가장 앞세우는 건 근본적인 개선 노력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면피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다만 베이비박스나 익명 출산이 최후의 수단으로는 영아의 희생을 막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출생신고가 어려운 엄마들의 절박함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겁니다. 감히 당사자가 되지 않고선 손가락질 할 수 없죠. 이젠 법 체계 안에서 법 테두리 밖에 있는 엄마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황민숙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긴급보호센터장)

 

“엄마가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집을 나갔어요. 갑작스럽게 닥친 육아는 힘들었지만, 나는 내 자식 버리지 말자는 생각으로 버텼죠. 출산 직후에는 머리가 하얗게 돼서 아기를 베이비박스에 맡겼었어요. 그런데 베이비박스에서 아기를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말을 들으니 ‘혼자가 아니구나’ 싶었어요. 결심이 선 거죠.” (김모씨·25, 대구)

 

◆그래도 책임지며 살기 위해

 

취재진이 만난 대부분 미혼모들은 제 역할을 다하지 않고 사라진 생부들과 달리 아이를 책임지는 삶을 살고 있었다. “미혼모들은 그래도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이라는 발언이 인터뷰에서 여러번 나왔다. 

 

이들의 삶이 만만치 않은 것은 맞지만 “어둡고 힘든 얘기만 나와서 동정을 구하려는 건 아니다”는 입장이 대부분이었다. 생부가 책임지지 않는 데 대한 조명이 더 필요한 것과는 별개로 어떤 형태의 가정이든 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맞다는 의미다. 그러나 미디어에 주로 노출되는 미혼모 관련 뉴스는 ‘안쓰럽거나 영아 범죄 관련이거나’의 극단뿐이다. 꿋꿋이 삶을 일궈가는 이들의 일상은 비교적 조명받지 못한다.

 

나아가 법안이 실질을 담을 수 있게 계속해서 개선이 필요하다.

 

“아기 엄마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양육을 포기하면 유보호시설에 간 아기는 바로 의료보험 1종 혜택을 받아요. 하지만 아이를 힘내서 키워보겠다고 하면 시설만큼의 의료 혜택은 꿈도 못 꾸죠. 임신기에도 국민행복카드 100만원 지원이 전부예요. 미혼모들이 열심히 일해서 저축하고 싶어도 복지급여가 바로 깎여버리니 양질의 일자리로 나아가지 못 하는 게 현실입니다.” (김민정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

 

<관련 기사>

 

[심층기획 - ‘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프롤로그 - 유령아빠, 불행의 씨앗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0509604

 

①[단독] 애 아빠 없이 ‘나홀로 출산’… “극도의 패닉 상태서 범행”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0508352

 

②‘국가의 부재’ 속에 아기가 떠난 그날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2500544

 

③벼랑 끝 내몰려 ‘아이 버릴 결심’ 하기까지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3500163

 

④아빠가 먼저 ‘두 사람’을 버렸다…부양 점수 5점 만점에 1.3점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3520264

 

⑤“엄마를 보호하는 게 영아 지키는 길”… ‘비정한 모정’ 다시 본 그 판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00252

 

⑥“주민등록 말소, 이사 등 온갖 꼼수”… ‘도망간 아빠’ 찾아 삼만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13897

 

⑦“책임 안 지면 빨간 줄…‘히트앤드런 방지법’, 왜 안 생기나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13915

 

⑧외국인 미혼모와 ‘무등록’ 아동…“아이 성년 되면 생이별”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9510570

 

⑨“가부장적 체류 제도가 ‘투명 아동’ 양산…핏줄·혼인 중심 틀 깨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0510203

 

⑩‘살아남은 유기 영아’ 이야기…원가정도, 새 가정도 없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0512263

 

⑪“누구에게도 기댈 생각을 못해요”… ‘버팀목’ 없이 고립되는 청년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2502617

 

⑫[좌담회] “예기치 않은 임신은 재난상황…생부에게 더 책임 물어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2513086

 

에필로그 - 이중잣대에 지친, 미혼모들의 속마음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4502371


정지혜·김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