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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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규의한·미동맹사] 이승만·아이젠하워 갈등과 ‘한·미 합의의사록’ 체결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정식 조인 된 뒤에도 한·미간의 관계는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다시 주장하면서 한국군의 대폭적인 증강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의 군사력이 강화되면 단독 북진의 수단으로 사용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의회 비준을 앞두고 1953년 11월 닉슨 부통령을 한국에 보내 친서를 전달했다. 이 서신에는 한국이 만일 단독 북진하면 한국군은 비참한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이며, 한국의 경제 부흥을 위한 예산을 의회에 요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54년 7월 미국 백악관에서 만난 이승만-아이젠하워 대통령.

1954년 1월 한국 국회 및 미국 상원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비준했다. 3월6일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 통일을 위해 단독행동을 취할 수 있음을 통지하면서, 3월18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상호방위조약의 비준서 교환은 연기됐다. 

 

이 대통령은 7월 미국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워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대통령은 자신의 무력 통일 구상을 설명했고, 미국은 먼저 공세적 행동을 취하는 것에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7월29일 미국 측은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합의의사록 초안을 한국 측에 전달했으나, 이 대통령은 서명을 거부하고 귀국했다. 

 

9월 초 작성된 합의의사록 초안에는 한국이 미국과 협력하고 한국군을 유엔사령부의 작전 지휘권 하에 남겨두는 조건으로 미국은 한국에게 7억 달러 상당의 경제 및 군사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당시 미국의 해외 원조 중 가장 최대 규모였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초안에 담긴 “모든 평화적 수단을 통해” 통일을 모색한다는 표현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삭제를 요청했다. 양측은 협상 끝에 통일문제와 관련된 조항 전체를 삭제하기로 합의했다. 

 

11월17일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합의의사록’은 변영태 외무장관과 브릭스 주한·미국대사가 양국을 대표하여 공식 서명하고 발효됐다. 같은 날 워싱턴에서 상호방위조약을 승인한 양국 의회 비준서가 교환됨으로써 11월18일 비로소 조약의 법적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합의의사록은 본문 6개 항과 부록 A와 부록 B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한국의 의도와 추진해야 할 정책 6가지와 미국의 의도와 추진해야 할 정책 5가지가 핵심 내용이다. 부록 A는 ‘효과적인 경제계획을 위한 조치’, 부록 B는 ‘1955년 회계연도에 대한 한국군 수준과 미국의 지원’으로 조인 당시 부록 A는 공개되었으나, 부록 B는 1급 비밀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에게 1955년도 회계연도에 4억 2천만 달러의 군사원조와 2억 8천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하고, 10개 예비사단의 추가 신설과 79척의 군함과 약 100대의 군용기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유엔군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위한 책임을 다하는 동안, 대한민국 국군을 유엔군 사령부의 작전지휘권 하에 둔다(제2조)”라고 명시했다. 한국은 육군 66만1000명, 해군 1만5000명, 해병대 2만7500명, 공군 1만6500명 등 모두 72만명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안보를 확약받았고, 합의의사록을 체결해 미국의 군사 및 경제원조를 얻게 됐다. 그 대신 미국은 유엔사가 한국군을 작전 통제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한국군의 독자적인 행동을 제약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 대통령의 일방적인 군사행동으로 인한 전쟁에 끌려들게 될 가능성을 대폭 감소시켰다는 점에서 상당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최완규 육사 외래교수·경제사회연구원 국방센터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