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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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유엔 인권이사국 노려… 서방 "인권에 대한 모욕"

BBC "10월 선거 앞두고 로비에 착수한 듯"
英 외교부 "인권이 무엇인지는 아나" 냉소

이웃나라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민간인 학살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러시아가 유엔 인권이사회(HRC) 이사국 자리를 노린다는 외신 보도가 나와 눈길을 끈다. 러시아는 원래 HRC 이사국으로 활동하다가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2022년 4월 유엔 회원국 대다수의 찬성으로 HRC에서 축출된 바 있다. 러시아의 HRC 재가입 시도를 놓고 서방에선 “인권(human rights)이란 개념 그 자체에 대한 모욕”이란 냉소적 반응이 나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세계일보 자료사진

25일(현지시간) 영국 BBC에 따르면 러시아가 오는 10월 치러질 유엔 HRC 이사국 선거 출마를 노린다는 정황이 포착됐다. BBC는 “러시아가 다른 유엔 회원국들한테 지지를 요청하며 보낸 문건 한 부를 입수했다”며 그 내용을 소개했다. 해당 문건에서 러시아는 “우리나라는 인권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찾고 다른 이사국들과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이어 “HRC가 한 특정 집단에 속한 국가들의 정치적 의사에 봉사하는 기구가 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 특정 집단에 속한 국가들’이란 곧 미국, 영국 등 서방을 지칭한 것으로 풀이된다.

 

우리 외교부에 따르면 유엔 HRC는 총 47개 이사국으로 구성된다. 대륙별 안배 원칙에 따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각 13석, 중남미에 8석, 서유럽에 7석 그리고 중유럽 및 동유럽에 6석이 배정돼 있다. 이사국은 모두 유엔 총회에서 실시하는 투표로 선출되며 임기는 3년이다. 연임은 2회까지만 허용된다.

 

10월 10일 치러지는 유엔 총회 선거를 통해 중유럽 및 동유럽 몫의 이사국 가운데 두 자리가 바뀌는데, 러시아가 그중 한 자리를 노린다는 것이 BBC의 설명이다. 경쟁 상대는 불가리아와 알바니아다. 세 나라 중 두 나라를 뽑는 것인 만큼 웬만하면 강대국 러시아의 승리를 낙관할 수 있겠으나, 이번에는 사정이 그리 녹록치 않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이고 더욱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민간인 집단학살(제노사이드)과 아동 강제이주 등 잔혹한 인권침해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전쟁범죄자로 몰려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의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에 러시아는 유엔 HRC 이사국이었다. 하지만 2022년 4월 유엔 총회는 표결 끝에 러시아의 이사국 자리를 박탈했다. 유엔 회원국 가운데 93개국이 러시아의 축출에 찬성했다. 58개국은 기권했다. 러시아 편을 들어 반대한 회원국은 고작 24개국에 그쳤다.

 

2022년 6월 러시아군에 의해 살해된 우크라이나 남성의 장례식에서 딸이 아버지의 관을 바라보며 오열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러시아의 유엔 HRC 재가입 추진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은 강력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영국 외교부 대변인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민간인은 물론 자국민을 상대로 자행한 인권 유린과 침해의 광범위한 증거가 있다”며 “이는 러시아가 인권을 다루는 HRC의 업무를 완전히 경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야당인 노동당도 “러시아가 HRC에 복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인권 개념에 대한 모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어 영국 정부를 향해 “2022년 러시아를 HRC 이사국에서 축출하는 결정을 내렸을 당시 표결에서 기권 의사를 밝힌 나라들까지 설득해 이번에는 결연히 반대표를 던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