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무너질 수 있다.’ 지난 9월 가을 개학을 불과 며칠 앞두고 전해진 소식에 영국의 교육 현장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됐다. 8월 말 영국 교육부는 전국 104개 학교에 긴급 폐쇄 명령을 내렸다.
문제가 된 것은 철근경량기포콘크리트(RAAC)라는 소재다. 이 소재가 쓰인 학교 건물은 ‘전조 증상이 전무하거나 매우 적은 상태에서’ 갑자기 붕괴할 수 있어 학생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영국 교육부의 설명이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폐쇄 조치된 156개교의 수리 비용만 1억5000만파운드(약 247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가장 최근 집계인 지난달 19일 기준 그 수는 174개교로 늘었다.
폐쇄된 학교의 학생은 임시 교실과 천막 등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영국 정부는 개학 연기 등 예방 대응까지 포함해 이번 조치의 영향을 받는 학교가 전체의 5% 이내라고 밝혔다. 이는 영국의 2만2000여개 학교 중 1100여개가 붕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붕괴 위기에 놓인 건 학교만이 아니다. 계속되는 조사에서 병원과 극장, 소방서 등에서도 RAAC의 소재가 드러나며 시민 안전과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 지난달 20일 웨일스 브리젠드에서 RAAC를 사용해 1970년대 만들어진 시장이 폐쇄됐고, 29일에는 영국령 저지섬의 유일한 병원에서 이 소재가 발견돼 긴급 조사가 시작됐다.
◆학교는 왜 무너졌나
국내에선 경량기포콘크리트(ALC)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오토클레이브 기포콘크리트(AAC)는 콘크리트 속에 기포를 발생시킨 뒤 고온·고압으로 굳힌 특수 콘크리트의 한 종류다. 이 AAC로 만든 패널에 철근을 삽입해 보강한 것이 바로 RAAC다.
기포가 들어간 RAAC는 일반 콘크리트 패널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에 설치와 이동이 쉽고 최대 6m까지도 중간 지지대 없이 설치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단열성이 뛰어나 방화벽에도 쓰인다. 이런 특징이 학교와 병원 등의 설계에 적합하다 보니 영국에서 1950∼1990년대 중반에 지어진 공공건물, 특히 평평한 지붕을 가진 건물에서 RAAC가 흔하게 발견된다.
하지만 RAAC도 단점이 있다. 구멍이 송송 뚫려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습기에 취약하다. 누수로 삽입된 철근이 부식되면 패널 전체가 휘거나 부서지기 쉽다. 그래서 RAAC 패널이 외부에 노출되는 경우 마감재를 사용해서 잘 덮어야 하고 철근도 따로 코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코팅이 또 콘크리트와 철근 사이의 접지력을 감소시켜 RAAC의 내구성을 떨어트리는 구조적인 한계도 가지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1996년 영국 건축연구소(BRE)는 RAAC 패널의 수명이 30년 남짓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영국 학교의 43%는 1951년∼1990년에 지어졌는데 이 학교들에서 RAAC가 발견된다면 이미 권장 수명을 초과한 상태인 것이다.
유럽권 방송 매체인 유로뉴스에 따르면 1980년대 초부터 이미 유럽에서 RAAC 부식으로 인한 지붕 붕괴가 보고되고 있었다. BRE는 2002년 보고서를 내고 오래된 RAAC 지붕에서 처짐·균열 등이 “과도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경종을 울렸다.
유로뉴스는 건물 소유주가 정기 점검이나 보수 관련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영국에선 이런 유지보수 작업이 종종 소홀히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습기에 약해 정기적인 보수가 필요한 RAAC에게 이는 치명적인 문제로 이어졌다. 특히나 비가 많이 내리는 영국은 대기가 습한 나라다.
◆영국은 왜 붕괴를 막지 못했나
BRE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18년 영국 켄트의 초등학교에서 지붕이 무너지는 사고가 난 뒤에서야 RAAC는 정부의 본격적인 조사 대상이 됐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2019년에도 유사한 붕괴 사고가 있었지만 예산 부족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으로 교육부는 안전 지침을 발표하는 데 그쳤다.
교육부는 지난해 9월부터 학교 건물 내 RAAC 소재 파악과 붕괴 위험성 평가를 진행했다. 그러나 올여름 위험성 평가에서 전조 증상이 없어 괜찮다는 결론이 났던 건물 3곳에서 연이어 기둥이 무너지자 정부는 평가 결과를 뒤집고 학교 폐쇄를 결정했다.
지난 10년 동안 집권했던 보수당이 RAAC 대책 마련을 위한 적기를 놓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수십 년 동안 RAAC에 대한 위험성이 알려졌고 2018년에는 사고까지 있었는데 올해 들어서야 수습에 나선 것이다.
지난달 가디언은 2021년 9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재임한 너딤 자하위 전 교육부 장관에게 RAAC와 관련해 복수의 문건이 보고됐으나 해당 사안에 우선순위가 부여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보수당 정부가 그동안 공공 부문 예산을 지나치게 삭감했다고 비판했다. 민간 싱크탱크 영국행정학회(IfG)에 따르면 2007∼2008년과 2020∼2021년 사이 학교 건물 수리를 위한 예산이 실질적으로 79억파운드(13조원)에서 51억파운드(8조원)로 3분의 1 이상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도에도 구멍이 있었다. RAAC의 수명은 영국 건축법이 권장하는 50년보다 낮은 30년에 그친다. 하지만 동시에 건물에 쓰이는 ‘교체 가능한 구조물’에 대해서는 10∼30년 사이의 비교적 낮은 수명만 갖춰도 쓸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RAAC는 후자에 부합해 각종 공공건물에 사용될 수 있었다.
건축자재 전문가인 후안 사가세타 영국 서리대 교수는 “이런 규정은 당시 교육부에 의해 각 학교로 전달됐다”며 “대부분 학교에선 RAAC를 모니터링하는 데 할당된 예산은 우선순위가 낮았고, 이는 RAAC가 제때 교체되지 못하는 문제로 이어졌다”고 영국 매체 컨버세이션에 전했다.
정부가 RAAC 문제를 방치해 온 것이 드러나면서 보수당의 리시 수낵 총리를 향한 대중의 시선도 싸늘하다. RAAC 논란 직후 치러진 지난달 19일 입소스 여론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86%는 영국에 새로운 수뇌부가 필요하다고 답했고, 보수당의 지지율(24%)도 제1야당인 노동당(44%)에 20%포인트나 뒤처졌다.
◆호주 등은 안전 지키며 RAAC 사용
영국만 RAAC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1950∼1980년대 호주, 뉴질랜드, 미국, 독일 등에서도 이 소재는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호주는 영국처럼 지붕·바닥 등 건물의 구조를 이루는 부분에 RAAC를 쓰지 않고 주로 벽과 조립식 부품에만 사용을 한정하면서 붕괴 위험을 낮출 수 있었다. 주택의 경우 아예 벽과 외장재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돼 있다.
호주에서 RAAC의 사용은 호주건축법전위원회(ABCB)가 정한 기준에 따르며 규제 준수 여부는 각 주가 감독하고 있다. 게리 레이크 ABCB 의장은 RAAC와 관련해 호주에서 “새로운 우려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주 정부의 건물 규제 및 감독도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교육부는 2017년 학교 인프라 규정을 새로 설립한 이후 학교 건물의 구조에는 “수명이 긴 자재”를 사용하도록 요구하고 있고, RAAC는 수명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구조재에 사용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호주 퀸즐랜드주도 관련 규제로 RAAC를 거의 벽에만 사용하고 있지만 영국에서 논란이 발생하자 모든 정부 건물에서 해당 소재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가디언에 전했다.
FT는 수십 년간 RAAC를 써 온 체코와 독일에서도 영국과 같은 붕괴 우려가 제기된 적이 없어 오히려 전문가들이 영국 상황에 의아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체코에서도 주로 지붕보다는 벽과 외장재에 이를 사용해 왔기에 지금까지 큰 문제를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RAAC가 대중화되어 있지 않아 이를 특정해서 규제가 이뤄진 적은 없다.
콘크리트 전문가인 크리스 구디어 영국 러프버러대 교수는 “(RAAC는) 오랫동안 인정받아 온 건축 재료이고 많은 장점이 있다”며 이번 논란 때문에 RAAC를 “시대에 뒤떨어진 재료 취급해선 안 된다”고 FT에 전했다.
구디어 교수는 “문제가 있는 RAAC의 일부는 피할 수 있었던 설계상의 문제였다”며 “독일 등은 더 나은 기술자 훈련 과정과 건설 관행을 가지고 있고, (영국도) 이런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