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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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경의행복줍기] 즐거운 가을맞이

친구 은이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벽부터 일어나 점심 도시락을 3개씩 싸야 했다. 서울로 유학 와서 하숙을 하던 시동생 세 명이 신혼집에 함께 살면서부터였다. 처음에 은이는 너무 힘들어서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늘 미안해하며 퇴근길 단팥이 잔뜩 든 붕어빵을 식지 않게 주려고 가슴에 품고 들어오는 남편, 늘 고마워하며 농사지은 첫 수확물을 소포로 부치는 시부모님, 그리고 빈 도시락 안에 들꽃 몇 송이 담거나 하트가 그려진 종이로 사랑을 표현하는 시동생들 때문에 고단함이 줄어들었다.

그보다 결혼이 뭔가? 달랑 사랑하는 남자 한 명만 나한테 오는 것이 아니고 그 남자 인생 전부가 딸려 오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 남자가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집안일에 늘 묶여 있으니 답답하고 우울증도 생겼다. 햇빛 따뜻하고 바람 달콤한 자신만의 탈출구가 절실했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은이는 시집을 사서 시를 읽기 시작했다. 햇빛이 부채살처럼 펼쳐진 툇마루 끝에 앉아서 천천히 음미하듯 시를 낭송했다. 그러면 힘든 마음의 때가 말끔히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답답함도 우울증도 바람처럼 날아갔다. 지금까지 은이는 시를 읽는다.

이 선배의 남편은 정년퇴직을 하자 곧바로 주유소에 취직했다. 계속 일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고 하지만, 이 선배는 남편의 깊은 뜻을 알고 있었다. 어떡하든 용돈벌이라도 해서 결혼한 자식들한테 폐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잠깐의 휴식도 자신한테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 선배는 하루 종일 주유를 하고 지친 몸으로 들어오는 남편을 위해서 저녁상을 정성껏 차려내지만 남편은 좀처럼 맛있게 먹어주지 않는다.

무엇이 남편한테 위로와 힘이 될까? 문득 이 선배는 시를 생각해냈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포기했다고 연애시절 남편은 수줍게 고백했다. 이 선배는 시집을 사와서 저녁마다 남편한테 시를 서너 편씩 읽어주었다. 시를 낭송하는 아내는 왠지 자신도 격상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멋쩍어하던 남편도 매일 그 시간을 기다리는 눈치였고 남편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디 그뿐인가. 남편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내 주위의 사람이 힘들 때, 망설일 때 내가 아주 조금만 도와주면 양지쪽으로 한 발짝을 움직일 수 있다. 좋은 시 한 편으로도 좋은 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 특히 가을은 시를 읽기 좋은 계절이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너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멀리서 빈다 ‘시인 나태주의 멀리서 빈다’ -아프지 말자 이 가을에.


조연경 드라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