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시절엔 한국을 대표하는 오른쪽 공격수였다. 1994년 국제배구연맹(FIVB) 월드리그에서 공격상을 받으며 별명은 ‘월드스타’가 됐다. 지금은 각종 분야에 월드스타가 존재하지만,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받은 스포츠 선수일테다.
현역 은퇴 뒤 방송 해설위원으로 변신한 후에도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에 경기의 맥을 정확히 짚어내는 해설로 최고라는 평을 받았다. 코치를 거치지 않고 2013년 창단한 OK금융그룹의 초대 사령탑을 맡고나선 창단 2,3년차(2014~2015, 2015~2016)에 V리그 챔피언 결정전 우승컵도 들어올렸다.
배구를 시작한 이후 맡은 역할마다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배구인 김세진(49). 지난 7월1일자로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운영본부장을 맡으며 행정가로 변신했다. 신임 본부장으로 3개월여 일하며 느낀 소회와 행정가로서 이뤄내고 싶은 일들과 한국 배구의 미래 등을 최근 서울 상암동에 위치한 KOVO 사옥에서 만나 들어봤다.
김 본부장은 “제가 호기심이 많다. 오랜 기간 선수로, 감독으로, 해설가로 활동했으니 소통하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행정가라는 또 다른 분야를 선택하게 됐다”면서 “3개월 간 KOVO에 매일같이 출근하며 일해 보니 선수, 해설가, 감독 때는 알 수 없었던 행정 업무를 하나하나 해나가고 있다. 지난 7월말에서 8월초 열렸던 구미 KOVO컵 때는 뒷짐만 지고 있는 게 아니라 발로 뛰어다니며 일했다. 이제 곧 열릴 6개월여 간의 대장정인 V리그의 예행연습을 치른 셈이다”라고 지난 3개월을 돌아봤다.
김 본부장이 맡은 운영본부장은 KOVO 경기위원회와 심판위원회를 총괄하는 자리로, 심판 판정과 같은 경기운영 제반에 관한 사항을 책임지는 자리다. 선수와 감독을 두루 거친 만큼 그는 “1점을 내기 위해 그 많은 땀을 흘렸을 선수들이 판정 하나에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면 안 된다는 게 내 원칙”이라면서 “예전 심판들 사이에선 ‘심판대에 올라가면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들 했다는데, 제 생각은 다르다. 심판은 권위는 없다. 중심만 있을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심판들의 몸에 밴 습관이나 권위 같은 것들을 부드럽게 순화시키는 게 내 역할이지 싶다. ‘일관성 있게, 형평성에 맞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판정에 대한 불만이 나오면 피하지 말고 무조건 응대를 하라고 주문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한국 배구는 현재 위기다. 남녀할 것 없이 모두 비시즌간 국제대회에서 ‘참사’에 가까운 성적을 거뒀다. 세계 변방에 위치한 지는 꽤 오래됐고, 이제 한국 남녀배구는 아시아에서만큼은 정상급이라는 자존심마저 아시안게임 ‘동반 노메달’로 사라졌다.
김 본부장은 “국제경쟁력 강화는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가 운영본부장으로 있기에 선수들의 기술적인 얘기를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닌만큼 조언을 하자면, 한국 배구의 뿌리가 되는 유소년 배구를 키워야 한다. 신장 좋고 운동능력 뛰어난 어린 친구들이 배구를 선택할 수 있게끔 터전을 만들어야 하고, V리그 구단들이 연고지 초중고교들을 키울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모두가 100% 만족할 수 없는 제도란 건 없는 만큼, 보완해 나가며 국제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기업인 구단들에게 이익을 포기하고 과감한 투자를 하라는 게 어불성설일 수 있지만, 지금 당장의 이익이 아닌 10년, 20년을 내다볼 수 있는 투자를 해야한다. 국제경쟁력 떨어지면 그 종목 인기는 떨어진다. 배구를 하는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면 리그 자체가 완전 무너지게 된다. 결국 답은 유소년 선수들 육성이다”라고 덧붙였다.
김 본부장이 당분간 지도자 복귀에 대한 생각을 접고 KOVO에 들어온 것도 유소년 육성 등 배구 관련 제도와 행정을 만질 수 있는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그는 “선수도 해보고, 감독도 해보고, 해설까지 다 해본 사람이 몇 명 없다”라면서 “KOVO에 와보니 각 구단들이 어떻게 운영하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언젠가 다시 현장 지도자로 복귀한다면 지금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OK금융그룹 감독 시절 2군 리그 창설을 적극적으로 주창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2군 리그가 창설되어야 준주전, 백업 선수들이 훈련이 아닌 실전에서 자신의 기량을 시험할 수 있고, 새로운 얼굴들이 발굴될 수 있다. 그러나 각 구단들은 비용 증가 등을 앞세워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 본주장은 “제가 KOVO에 들어와 보니 왜 구단들이 2군 리그를 안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건 또 아니더라”면서도 “그럼에도 2군 리그가 만들어져야 프로 전체의 파이가 더 커진다. 지금은 웜업존을 지키는 선수들의 출신 학교와 신체조건, 포지션만 알 수 있을 뿐, 이 선수의 기량을 수치로는 알 수 없다. 2군리그에서 많이 뛰게 해야한다. 지금 일부 선수에게 쏠려 있는 샐러리캡의 거품을 좀 덜어내서, 그 비용을 2군리그 창설에 KOVO가 앞장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김 본부장의 계약 기간은 1년이다. 내년 7월이 되면 그 계약은 연장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김 본부장은 “계약 기간이 1년씩 주어지기에 발 빠르게 움직이며 즐겁게 일하고 있다. 내게 실질적인 권한을 주겠다며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해서 여기까지 왔다. 더 즐겁게, 그리고 열심히 해보겠다”고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