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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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간 40%가 퇴사”…서울대병원 직원들이 파업에 나선 이유 [사사건건]

“퇴근하고 나면 죄책감이 몰려와요.”

 

김경오(30) 간호사는 퇴근 후면 하루 온종일 바삐 거닐며 스쳐지나간 환자들이 눈에 밟힌다. 서울시보라매병원 내과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김 간호사는 홀로 3명의 환자를 책임지고 있다. 그의 몸은 한 개 뿐이지만, 환자의 상태가 악화하는 속도는 그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환자의 산소포화도, 혈압, 호흡수 등을 측정하는 기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알람을 울리며 그를 부르곤 한다. 그 와중에 CT(컴퓨터단층촬영) 검사를 보내야 하는 환자가 생기기도 하고, 주치의가 인공기관 삽관을 요청하기도 한다.

 

김 간호사는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의 배변을 처리해주고 침상 높이도 조절해주고 싶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나중에 해드릴게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이어 “환자와 보호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현실에 괴리감을 느낀다”며 한숨지었다.

민주노동조합총연맹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서울대병원, 보라매병원) 노동조합 총파업 첫 날인 11일 서울시 종로구 서울대학교 병원 앞에서 직원들이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밥 먹으려면 간호사 1명이 환자 6명 봐야”

 

상황이 이렇다보니 간호사들은 식사를 거르기 일쑤다. 김 간호사가 한달 근무 20일 중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건 많아야 6일 즈음. 나머지 14일은 휴게실에서 간단히 라면 등으로 떼운다. 김 간호사는 “밥을 먹는 동안은 다른 간호사가 제 환자까지 총 6명을 봐야 한다”며 “알람만 봐주는 정도가 되는데,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길까봐 그냥 밥을 거르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열악한 근무조건에 지친 간호사들 가운데 적잖은 인원이 병원을 떠나고 있다. 지난 10개월 동안 서울시보라매병원 내과중환자실 간호사 40명 중 16명이 사직했다. 그는 “병원 인력 부족 문제는 병원 직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병원에서 치료받는 환자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인간적 치료를 위해서는 인력 충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대병원·보라매병원 무기한 파업

 

국립대병원 노동자들이 인력 부족 등을 호소하며 파업에 나섰다. 11일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지회(서울대병원·서울시보라매병원)가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필수인력 충원과 함께 어린이병원 병상 수 축소 금지, 진료 기여수당·의사 성과급제 폐지 등 의료 공공성 강화를 요구했다.

11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본관 앞에서 서울대병원 노조 파업 출정식이 열렸다. 한 환자가 피켓 든 노조원들을 뒤로하고 병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뉴스1

노조는 “김영태 서울대병원장은 취임 첫해 의사진료수당을 100억원(60%) 이상 인상했지만 의료공공성, 인력, 노동조건에는 쓸 돈이 없다고 한다”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의료인력이 부족해 치료할 병원을 찾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생겨도 정부는 공공병원 인력확충 문제 개선 의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노조는 서울대병원 64명, 보라매병원 53명 총 117명의 인력충원과, 병가·청가·휴가 등 상시적인 결원에 대한 660명 대체인력을 요구하고 있다. 환자 안전을 위해 중환자실 간호사 대 환자의 비율은 1:2로 낮추고, 주간과 야간의 간호사 수를 동일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게 이들 입장이다.

 

서울대병원이 어린이병원 병상 14개를 줄이고 134평을 교수 휴게실로 사용하기로 한 데 대한 비판도 나왔다. 노조는 “병원이 6∼7인실 위주의 과밀한 병동 구조를 개선해 1·2·4인실로 바꾸겠다고 하는데, 1인실은 비보험 병실이기 때문에 결국 환자의 병실료 부담이 늘어난다”며 “서울대병원의 공공적 역할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서울대병원 노조가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한 11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파업 관련 안내문이 게시돼 있다. 뉴스1

◆파업 장기화·전국 확산 우려도

 

서울대병원과 서울시보라매병원 노조에는 간호사, 임상병리사, 의료기사 등 약 3800명이 소속돼있다. 이 중 응급실과 중환자실 등 환자 생명과 직결된 부서 직원들은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근무를 이어가기로 했고, 나머지 조합원 중에서도 1000명씩만 돌아가면서 파업에 참여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파업 첫날 서울대병원은 큰 차질 없이 진료가 진행됐다. 다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파업 장기화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 서울대병원 본관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집회를 지켜본 이새봄(24)씨는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지난 10일간 간호사들이 일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며 “환자 입장에서는 하루가 급한 상황이라서 위(병원 측)에서 빨리 해결해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번 파업이 전국 국립대병원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의료연대본부에 소속돼 있는 국립대병원은 서울대 외에도 경북대 외에도 충북대, 강원대, 제주대가 있다. 우선 의료연대본부 경북대병원분회도 이날 8년 만에 총파업에 돌입했다.

경북대학교 병원 노조 파업 첫날인 11일 조합원들이 병원 본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파업 첫날 경북대 병원 ‘어수선’

 

이날 대구시 중구 경북대병원은 이른 아침부터 곳곳에서 업무 차질이 빚어지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노조는 이날 오전 9쯤부터 본원 1층에서 환자와 방문객들에게 파업 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선전 활동을 벌였다. 복도를 비롯해 곳곳에는 큼지막하게 ‘파업 지지’라고 쓰인 종이와 현수막이 걸렸다.

 

본원 로비에는 농성을 벌이는 조합원과 환자가 뒤섞여 북적거렸다. 방문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농성 모습을 지켜봤다. 허리가 아파 병원을 찾았다는 환자는 “진료 예약을 하러 왔는데 2주 이상 지나야 가능하다고 설명을 들어서 당황했다”며 “그때까지는 조금 아파도 참아야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이번 파업에는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경북대병원 분회 조합원 2400여명 중 800여명이 참여했다. 노조는 간호사 1인당 환자 수를 10명대에서 6명까지 줄일 수 있도록 인력을 충원해 줄 것과 임금 현실화, 직무성과급제 저지 등을 요구하고 있다.

 

노조의 파업이 장기화하면 환자 불편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병원 측은 현재 행정 직원 70여명을 원무와 수납 등 보조 업무에 임시 투입했다. 병원 측은 “파업이 빨리 종료될 수 있도록 노조와 적극적으로 협상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조희연·배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