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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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주민과 1대 1 ‘눈높이 소통’… 다양한 방식으로 의견수렴 [심층기획-환경영향평가 2.0]

(3회)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주민 참여 자유로운 오픈하우스 형식
공사 소음 인한 야생동물 피해 등 묻자
사업 총괄 담당자 등 2시간 넘게 답변
일방적 발표보다 주민 이해 증진 주력
“내가 궁금한 것만 골라서 확인” 호평
불참 주민 위해 논의 결과 온라인 게재

“여기 라쿤(너구리)이랑 사슴이 사는 거로 아는데 다리가 생기면 동물들은 어떡하나요? 공사 소음 때문에 동물들이 피해를 볼 것 같은데….”

 

지난달 19일(현지시간) 오후 5시쯤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 카운티 내 한 커뮤니티 센터에서 열린 ‘로널드 레이건 워싱턴 국제공항∼크리스탈시티 간 고가도로 건설 사업 환경평가서(EA·Environmental Assessment)’ 공청회 현장. 이 지역 주민 펜 벤하임이 패널 하나를 유심히 보더니 이같이 물었다.

사업 총괄 담당자인 카일 클링(가운데)이 패널 앞에서 주민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워싱턴 국제공항∼크리스탈시티 간 고가도로 건설 설계도가 담긴 패널 곁에는 사업 총괄 담당자인 카일 클링이 벤하임의 말을 듣고 있었다. 벤하임은 본인 휴대전화를 꺼내 저장해 온 설계도 사진을 보이더니 “지금도 이 도로에 사슴이 갑자기 튀어나와 사고가 나곤 한다”며 “공사 때문에 너구리나 사슴이 살 곳을 잃어 주택가로 오면 어떡하냐”고 재차 물었다.

 

클링은 벤하임의 휴대전화 화면 속 설계도를 손가락으로 짚더니 “야생동물에 미칠 영향을 고려했을 때 14개 후보 중 이곳이 가장 적합했다”며 “나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동물들이 서식지에서 분산돼 주택가로 옮겨갈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선 논의 중”이라고 답했다.

 

클링은 이후에도 벤하임 곁에 서서 질문 하나하나에 세세하게 답변했다. 벤하임은 클링 등 사업 담당자들과 2시간 넘게 이 사업 환경평가서에 대해 대화했다. 사업 담당자들은 모든 질문에 1대1로 답했다. 대개 좌장이 ‘원활한 진행’이란 명분 아래 발언권을 제한해 가며 엄격하게 순서를 지켜 주민과 사업자 측 간 질의응답이 오가게 하는 국내 공청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미국은 대부분 사업에 대해 개시 전 사업자가 환경영향을 예측하고 분석한 환경평가서를 작성하도록 하고 있다. 환경평가서는 정부 홈페이지 등에 공개되고 30일간 주민 의견을 구하는 절차를 거친 뒤 환경영향평가서(EIA·Environmental Impact Assessment) 작성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환경영향평가서는 쉽게 말해 환경평가서보다 더 세밀한 평가라고 보면 된다.

 

국내 환경영향평가 제도의 경우 평가서 초안이 마련된 뒤에야 의견수렴을 거치는 데 반해 미국은 사실상 환경영향평가 전 단계인 환경평가서 작성 단계에서 주민 의견을 듣는 게 특징이다.

◆혼자만 말하는 건 소통이 아냐

 

“8학년(중학교 2학년)도 오늘 공청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의 목표다.”

 

환경평가 컨설팅 담당자 로렌트 카타레이드는 이날 공청회 현장에서 기자에게 “주민 의견을 환경평가서에 반영해야 한다. 평가서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업자들도 모인 것”이라며 이같이 설명했다.

 

그런 목적에 부합하려는 듯 이날 공청회는 ‘오픈하우스’ 형식으로 진행됐다. 주민들이 공청회장 곳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원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다. 누구나 편하게 사업자 측에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실제 공청회장에는 단상도, 나열된 의자도 없었다. 공간 가운데는 누구나 자유롭게 모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비어 있었으며, 그 주변을 사업의 각 단계를 설명한 부스 15개 정도가 둘러싸고 있었다. 카일은 그중 프로젝트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보완책에 관한 내용이 담긴 패널 앞에서 주민들의 질문을 받았다. 주민들은 각자 궁금한 내용을 가감 없이 물었고, 담당자 답변이 부족하면 지체없이 추가 질문을 했다.

 

오픈하우스 공청회를 계획한 클링은 “담당자만 앞에서 말하는 건 소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주민들이) 궁금한 점을 듣고 설명하는 데 집중할 것”이라 설명했다. 다른 공청회에도 몇 차례 참석한 경험이 있다는 한 주민은 “이렇게 내가 궁금한 것만을 골라서 바로 물을 수 있다는 게 좋다”고 평가했다.

 

국내 공청회는 단상 위에 선 사업자·주민 측 패널의 일방적 발표가 전체 일정 중 70% 이상을 차지하는 게 보통이다. 최근 강원 지역에서 열린 ‘강릉시 에코파크 조성사업 환경영향평가서(초안)’ 공청회만 해도 이 같은 사업자 측 발표 진행 중 방청객에 있던 주민들이 거센 반발을 쏟아내면서 파행했다.

공청회장 한쪽에 주민들의 구두 의견을 받아 적는 ‘의견 기록 담당자’가 앉아 있다. 담당자는 주민들이 말한 의견을 적어 사업자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더 많이 듣고, 더 다양하게 수렴하기

 

클링은 “사업이 아직 예비 단계라 환경평가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며 “팝업 설명회(반짝 설명회)나 온라인 주민 설명회를 계속해서 열고 피드백을 구했다”고 말했다. 공청회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의견수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이날 환경평가서 공청회 전 고가도로 건설 사업을 설명하는 팝업 설명회가 12차례 진행됐다. 이는 사업이 이뤄질 장소 인근의 지하철역 등 인파가 몰리는 곳에서 사전 공지 없이 열렸다.

 

주민 의견 개진 방식 또한 단 하나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고 했다. 공청회에 참석한 주민들은 사업자와의 대화뿐 아니라 직접 수기로 의견을 작성해 제출하기도 했다. 사업자 측은 공청회장에 ‘의견 기록 담당자’를 따로 배치해 놓고 있었다. 의견 기록 담당자는 주민이 구두로 말한 의견을 직접 문서화해 공청회 종료 후 사업자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주민과 사업자 간 의견 전달이 보다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다만 미국 환경평가서 공청회도 그 특성상 주민 의견을 100% 수렴할 수 있는 완벽한 대안이라고 할 순 없다. 결국 공청회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 주민은 고가도로 건설 사업에 대한 의견 개진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클링은 “평일 저녁 5시부터 7시에 시간을 비울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오늘 이뤄진 모든 논의는 홈페이지에 공개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이 프로젝트는 15∼20% 정도 된 단계라고 볼 수 있다”며 “2026년까지는 사업 디자인에 집중하며 어떻게 더 많은 의견을 듣고 반영할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며 “2026년까지는 사업 디자인에 집중하며 어떻게 더 많은 의견을 듣고 반영할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알링턴=글·사진 이민경 기자 min@segye.com